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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산티아고 순례

[까미노 10.] 벨로라도 가는 길, 자갈밭에서도 싹은 튼다. | 240513

by 바이올렛yd 2024. 10. 2.

산토도밍고 데 라 칼자다( Santo Domingo de la Calzada )에서 벨로라도(Belorado)까지  23km 
6시간 소요 (am 6:20 ~ pm 12:20)


2024년 5월 13일 월요일

 

지난밤 알베르게에 한국인 단체 순례객들도 많았지만 새벽에 출발준비하느라 화장실에 갔다가 새로운 한국분들과 인사를 나눴다.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 이는 남편과 함께 순례길에 나섰다 하였고, 70대 초반 여자분은 잘 알고 지내는 분들이 순례를 떠난다 하여 '나도 데리고 가라'하며 따라나섰다고 하셨다. 이번에 못 왔으면 아마도 영영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모른다며 간절한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끝까지 완주하실 수 있기를 바란다며 '부엔까미노!'라 작은 소리로 외치며 화장실을 나왔다.

 

알베르게 예약을 해놓으니 맘이 편하긴 하다. 단잠을 자고 여유 있게 준비한다고 했지만 그래봐야 출발시간은 별 차이 없다.  

 

전날 산토도밍고성당 입장권 패키지로 방문했던 산프란치스코 수도원으로 가는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여느 때처럼 오늘도 새벽하늘이 불그스레 우리를 반기고 있다. 

 

고요함 속에 간간이 들리는 맑은 새소리, 서서히 밝아오는 동녘하늘.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오늘도 서쪽 어딘가에 있을 우리의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하여 걷는다.

 

무릎 상태는 현재 어떤지, 불편함에도 쉬지 않고 너무 무리하게 걷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무릎이 빨리 나아지기를 기대하며 다른 곳에 불편함이 또 생기면 어쩌나 싶어 내 배낭은 순례 셋째 날부터 계속 차 타고 이동 중이다.

 

6시 56분경 아침해가 떠올랐다.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남편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 찍기에 몰입하고 있다.

 

남편은 여행을 가면 무거운 DSLR 카메라를 늘 챙겨 가지고 다녔다. 여행기록을 블로그에 남기는 난, 남편이 찍는 사진에 의존해 나중에 포스팅이라도 하려면 남편이 찍은 사진이 없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까지 자료사진 찍기에 나태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번 순례길은 달랐다. 매일 짧지 않은 거리를 걸어야 하는데 무거운 카메라를 가지고 오기엔 무리였다. '순례길에 집중할 것인가? 아님 근사한 작품사진을 담아 올 것인가?'를 두고 고민한 끝에 성능 좋은 휴대폰을 준비하기로 결정했었다.  함께 여행 다니기를 즐겼던 난, 어떻게 보면 그동안 전문 사진사를 곁에 두고 여행을 다녔던 셈이었다.  

 

길가에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연두콩밭에도 아카시아꽃이 피었겠지? 들판에서도 꽃들에서도 우리 땅에서 피고 지는 꽃과 나무들과 흡사하나 약간씩 다름을 가지고 있다. 주로 우리나라 토종 식물들은 작고 앙증맞은 것들이 많고, 사람과 같이 서양의 식물들은 대체로 큰 듯하다. 남편은 아카시아꽃내음을 맡기 어렵다고 했다. 꽃을 하나 따서 향기를 맡아보니 꽃향기에 있어서는 우리 땅의 아카시아꽃이 훨씬 나은 것 같다.

 

출발한 후 한시간쯤 걸었을 때, 길가에 철로 단순하게 만들어진 십자가를 만났다. 산티아고 순례와 관련된 십자가겠거니 생각했는데 다른 배경이야기가 있었다. 산토도밍고 데 라 칼자다와 그라뇽 사이의 땅은 역사적으로도 비옥한 땅으로 두 마을사이의 다툼의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대표 한 명씩 뽑아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결투를 하기로 하고, 목숨을 건 결투의 결과 그라뇽의 마르띤 가르시아라는 사람이 승리를 하였으며, 그 결투가 벌어졌던 자리에 '용감한 자들의 십자가'가 세워졌다고 한다. 

 

며칠 동안 계속 보고 지나온 풍경들이라 아름다운 풍경 속에 젖어 들어 이젠 익숙한 풍경이다. 

 

그동안 보아왔던 포도밭과 올리브나무 밭보다는 비옥한 토양 때문인지 밀과 보리, 더러는 완두콩 같은 작물도 보였다. 

 

출발 한 시간 반 만에 그라뇽에 도착했다. 

 

출발하기 전 아무것도 안 먹고 바로 출발하여 허기가 몰려왔다. 마을 초입에 푸드트럭이 자리하고 있어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로 아침을 먹었다. 길거리에서 직접 짜낸 오렌지주스를 실컷 먹을 수 있다니 행복하다. 과일이 풍부한 나라니 가능한 일일 거다. 

 

에너지를 보충하고 화장실도 이용하고 8시 15분경 다시 출발했다. 마을을 빠져나올 무렵 길가의 벤치에 앉아 고양이와 함께 햇빛을 즐기고 계신 스페인 아저씨를 만났다. 거동이 불편해 보였는데 눈이 마주쳐 '올라!'하고 인사하니 '부엔카미노!'라 답하신다. 

 

그라뇽마을 끝 언덕 쉼터에서 모녀로 보이는 외국인 여자 두 분이 사진을 찍고 있다. 출발하면서부터 줄곧 우리와 비슷한 보폭으로 걷고 있다. 사진 찍고 있는 분들께 인사하고 우리는 바로 언덕길을 내려갔다. 

 

푸른 초원에 맨땅이 드러나있는 드넓은 밭이 보이는데 온통 자갈투성이다. 아마도 수확을 마친 밀밭이 아니었을까? 저런 자갈 틈 사이로 싹을 틔워 양탄자를 깔아놓은 것처럼 밀밭을 멋지게 가꾸어내었음을 생각하면 참 놀랍다. 물론 기계를 이용하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자연의 힘은 위대하다.


길가에 산티아고 길 안내판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이곳이 라 라호아주와 부르고스 주의 경계라 한다. 소떼가 지나갔는지 소똥 무더기가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소똥은 기본이라고 하더니 우리도 이젠 소똥마저도 자연스럽다.

 

그라뇽에서 약 4km 떨어진 레데시아 델 까미노 마을이 보인다. 

 

마을 입구에 순례자 모형이 서있어 나도 그 뒤에 서보았다.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우린 그대로 마을에 진입하였다. 이 마을이 부르고스 주의 첫 번째 마을이라 한다. 

 

다음 마을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로변을 따라 걷다가 밀밭사잇길로 들어가니 성당의 종탑이 보인다. 

 

까스띨델가도 마을이다. 

산타마리아 라 레알 델 깜뽀 소성당과 산 뻬드로 교구성당

까스띨델가도를 통과하고 그다지 머지않은 곳에 또 마을이 있었다. 아마도 농경지가 주변에 많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빌로리아 데 리오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산토도밍고 데 라 칼자다 성인이 태어난 곳으로 매년 5월 12일에 성인을 기리는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성인의 탄생지답게 마을 한가운데 있는 성모승천성당 앞에 성인의 동상이 서있다.

 

다음 마을까지는 약 3.5km. 쉬지 않고 두 시간 이상 걸었으니 다음 쉬어갈 장소가 나오면 꼭 쉬어가기로 했다. 

 

비야마요르 델 리오를 지나면서 드디어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원한 맥주 한잔씩 마셨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매일 맥주를 마시고 있다. 스페인 맥주는 시원하고 맛있다.

 

포도나무를 담쟁이넝쿨처럼 키워 놓은 게 예술이다.

 

오늘의 목적지 벨로라도까지는 이제 약 5km만 더 걸으면 된다.

그동안 길을 오가며 만났던 이들이 모두 먼저 가고 우리만 달랑 남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벨로라도를 얼마 안 남겨두고 새로운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선글라스를 끼고 복면을 하고 있어 한국인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는데 앞서 걷다가 뒤돌아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 혹시 길에 떨어진 수건을 못 보았냐 묻는다. 길가 풀 위에 떨어져 있는 걸 본 것 같다 했더니 남편분이 달려가 가져온다. 아마도 젖은 수건을 가방에 매달았다가 떨어졌나 보다. 그들은 우리보다 이틀먼저 생장을 출발하였으며 팜플로나와 로그로뇨에서 연박하였다고 한다. 

 

12시 20분경 벨로라도에 도착했다. 우리가 예약한 알베르게는 마을 초입에 있어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멈추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공립알베르게는 마을 한가운데의 성당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안쪽에 있는 방을 배정받았는데 외국인 부부를 제외하고 모두 한국인이었다. 새벽에 화장실에서 만났던 70대 어르신과 일행 2명이 우리 방으로 배정을 받아 들어왔고, 나중에 세명의 한국청년들이 들어와 우리 방에 한국인은 모두 8명이나 되었다.  세탁을 하려 빨랫감을 가지고 나갔더니 세탁기가 세대나 있지만 한대만 가동이 되고 나머진 고장이 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손빨래해서 빨랫줄에 널어놓고 알베르게와 함께 운영하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순례자 메뉴로 점심을 먹었다.

순례 이후 처음으로 먹어보는 제대로 된 순례자 메뉴로 참 맛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그사이 하늘에 구름이 제법 많아졌다. 다음날 비가 올 예정이라 하더니 일기예보가 맞기는 한가 보다.

 

모처럼 든든한 식사를 하고 마을로 내려갔다. 산타마리아성당에 들어가니 우리 방에 배정받은 한 청년이 앉아있었다. 우리도 조용히 앉아 기도하고 밖으로 나왔다.

"저 청년은 혹시 신학생이 아닐까?"

"왜?"

"기도하고 있는 뒷모습이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서..."

 

광장 근처 바에서 남편은 맥주 한잔, 난 라임아이스크림을 사서 야외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먹고 있는데 젊은 한국여자가 큼지막한 망을 들고 나타났다. 우리를 보고 반가워 인사한다.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반갑게 인사하는 그녀에게 혹시 마트에 다녀오냐 물었다. 물건을 사 들고 온 줄 알았더니 세탁물을 싸들고 빨래방을 찾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녀는 전날 우리가 묵은 알베르게에 투숙했던 단체순례객중 한분이었다. 단체 순례가 편하긴 한데 가끔 단체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며 지금도 혼자 돌아다니려 무리에서 탈출했노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든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녀가 알려준 대로 마트를 찾아 헤매다가 어린 학생에게 마트 가는 길을 물었는데 길을 알려준다. 주변에 서 있던 남자분도 덩달아 마트 가는 방향을 알려주시고, 까미노에서 느낄 수 있는 친절이다. 

 

내일 먹을 간식거리와 함께 우유와 시리얼을 사가지고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저녁식사는 간단하게 마트에서 사온 음식으로 해결하려 했는데, 시설 좋은 알베르게라 좋아했던 반면 중요한 주방이 없었다. 아마도 레스토랑이 함께 있어 그런 거였겠지만 그래도 간단히 사용할 수 있는 주방이 있으면 좋았겠다 싶은 게 아쉬움이 컸다. 결국 레스토랑에서 컵을 얻어와 야외테이블에 앉아 시리얼과 빵과 우유, 과일로 저녁식사를 해결했다. 

 

내일은 비가 온다 하는데 우리가 걷는 길엔 문제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