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뿌에르까(Atapuerca)에서 부르고스(Burgos)까지 20.4km
4시간 45분 소요 (am 6:00 ~ am 10:45)
2024년 5월 15일 수요일
이른 새벽 썰렁한 느낌이 들어 살펴보니 방문이 열려있다. 침대 위층 청년이 아마도 젊은 혈기로 더웠는지 밤늦게 들어오면서 방문을 열어두었던 모양이다. 방문을 닫고 다시 누워 조금 더 잠을 자 두려 했으나 이미 정신을 들어 더 이상 자기는 힘들다. 창가 쪽 침대를 쓰는 남자 두 분이 먼저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내 침대 위층 청년도 일어나 이것저것 챙기더니 세 남자가 모두 일찌감치 밖으로 나갔다. 5인실 룸에 결국 우리 둘만 남았다. 한갓 지게 방문 닫고 환하게 불 켜놓은 채 퇴실 준비를 하였다. 아침마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떠날 준비를 하던 것에 비하면 금상첨화다. 창가 침대 끝에 앉아 간단하게 요기도 하였다.
오늘은 부르고스로 이동한다. 부르고스는 우리 순례길 초반 쉼표를 찍는 곳이라 뭔가 일단락 지어지는 듯한 느낌이다.
새벽 6시에 출발, 늘 우리의 순례길을 걱정하며 궁금해하는 아이들을 위해 가족톡에 출발시간과 목적지를 올리고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오늘도 하늘이 잔뜩 흐려있어 칠흑같이 어둡다. 작은 마을이라 불빛도 별로 없이 금방 어두운 숲길로 접어들었고, 랜턴 없이 출발해 걱정스러웠으나 그나마 길은 허옇게 어렴풋이 보인다. 전날 비가 와 군데군데 물웅덩이가 있어 조심스럽게 걷는 중 앞서 가는 사람들이 어렴풋이 보이면서 우리가 순례길을 잘 찾아 걷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언덕을 오르면서 뒤돌아본 하늘에 깎아낸 듯한 구름 틈새로 곧 해가 뜰 것을 예고하듯 붉은 빛이 살짝 보인다. 물 웅덩이가 있는 진흙길을 지나 큰 자갈과 바위가 널려있는 언덕을 오르니 큰 나무 십자가가 서있다.
나무십자가 아래 수북이 쌓여있는 누군가의 소원이 담겨있는 돌멩이들 위에 나의 소원의 돌멩이도 추가했다.
나무십자가를 지나 꽤 넓은 평지가 산 정상에 펼쳐져있다. 쉬어갈 수 있는 벤치와 함께 글귀가 쓰인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글귀를 번역해 보니
'나바라 산 부르게테에서 순례자가 스페인의 광활한 들판을 본 이후로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경치를 누린 적이 없었다.'
그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라는 의미로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감탄에 감탄을 더하며 걷고 있는 중이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멀리 불빛이 넓게 퍼져있는 도시가 보인다. 바로 오늘의 목적지 부르고스다. 위에서 내려다보기엔 금방 갈 것만 같은데 적어도 15km 이상은 가야 한다.
희망고문이 따로 없다. 눈앞에 목적지가 보이니 걷는 길이 더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 기온은 뚝 떨어져 패딩을 껴입고 걷는데도 춥고 손도 시리다.
굽이굽이 밀밭사이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창고 같은 큰 건물 앞에 여러 나라 국기가 그려져 있는 버스가 한대 나타났다. 폐버스를 알베르게 안내 광고판으로 쓰고 있는 모양인데, 한국인 순례자가 많다고 하더니 증명이라도 하듯 한가운데에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산을 넘어 처음 만난 마을은 비얄발이라는 마을이다. 약 한 시간 반쯤 걸린 것 같다. 그라시아님은 다음마을로 갔다 하더니 이 마을에서 묵었을까? 전날 젊은 부부와 조우를 한 후 내내 그라시아님이 생각났다. 젊은 부부와는 아마도 그라시아님이 부르고스에서 멈출 거라 기대에 찬 이야기 했었다. 길건너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출발하는 아가씨가 다리가 불편한지 절룩거리며 나온다. 한국인인 줄 알고 인사하며 우리말로 말을 걸었더니 한국인이 아니라 한다. 미안하다 하며 어디에서 왔냐 물으니 타이완이라 답한다.
타이완 아가씨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 보니 또 마을이 나온다. 까르데 뉴엘라 리오 삐꼬라는 마을을 가로질러 가는 길 옆에 공립 알베르게가 나타났다. 먼저 비얄발의 알베르게보다는 좀 더 시설이 낫지 않을까 싶기는 하지만 작은 시골마을이라 침대는 몇 개 없어 보인다.
마을을 지나고 나서는 도로변 길을 따라 걸었다. 순례길이 맞나 생각이 들 정도로 마냥 도로변 길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멀리 십자가가 있던 산이 보인다. 우리 뒤에 출발한 이들이 저 길 어디쯤 오고 있겠구나 생각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젊은 부부가 나타났다. 우리보다 훨씬 늦게 출발한 걸로 아는데 벌써 따라왔냐 했더니 멀리서 우리 부부가 보여 빨리 걸었다고 한다.
약 한 시간쯤 걷는 내내 빨리 부르고스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재미없는 아스팔트 직선길을 마냥 걸어야 함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다리 건너 갈림길이 있었다는데 왼쪽길로 갔다면 비가 온 뒤라 물 웅덩이가 많았을 거라 남편이 이야기한다. 언제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있게 마련이니 그 길이 궁금하기는 하다. 지금 걷는 길에 비해서 그 길이 훨씬 순례길답기는 하다 하니 더욱 그렇다.
부르고스 초입에 들어서면서 순례 화살표가 잘 보이지 않아 지도를 보며 정신 차리고 길을 걸어야 했다.
걷는 도중 길가에 ATM이 보여 시험 삼아 출금을 해보려 했는데 수수료가 7유로나 되어 취소했다. 다음에 현금이 필요할 때 한꺼번에 많이 인출하자 하며, 남편이 넉넉히 환전을 해와서 다행이다 했다. 그러고 보니 현금만 받는 알베르게도 꽤 많았었다.
14세기에 지어진 산타마리아 라 레알 성당을 지나며 잠시 성전 안으로 들어가 앉아 지금까지 안전한 순례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심에 감사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외벽에 산티아고 조개 문양이 있어 그쪽을 향하여 걸었다. 그동안 잘 보이지 않던 화살표도 이제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진짜 아름다운 옛 도시의 풍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여 목적지에 거의 다 와가는구나 생각했지만 쉽사리 순례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산 레스메스 성당에 들어가 미사시간도 알아보고 십자성호를 긋고 다시 나왔다. 이 성당에는 이 도시의 수호성인인 레스메스 성인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현대식 건물과 옛 건물이 조화롭게 섞여있어 보는 방향에 따라 중세와 현대를 넘나드는 듯하다.
도시에 진입한 지 약 2시간 만에 우리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유치원 어린이들로 보이는 아이들이 알베르게 앞에 서서 선생님 말씀에 따라 우리 보고 "부엔까미노!"라 합창을 한다. 마치 우리의 도착을 환영해 주는 것처럼. 산티아고 순례에 대해 이야기하며 알베르게에 견학을 왔나 보다. 잠시 후 알베르게 문이 열리고 어린이들이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 문이 닫혔다.
10시 45분 도착. 체크인 시간까지는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 알베르게 앞에 가방줄을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젊은 부부의 신랑이 와서 날씨도 추운데 근처의 바에 가서 커피 한잔 하며 기다리자 한다. 흔쾌히 그를 따라갔더니 바 안에 그라시아님과 젊은 부부의 아내가 앉아있다. 너무 반가워 포옹 한번 하고 커피 한잔씩 마시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그라시아님은 지난밤에 비얄발에서 묵었는데, 새벽에 일찍 깜깜한데 출발하여 8시경 도착했다 하신다. 걷는 내내 너무 추워서 도착한 후 성당에 들어가 앉아있다가 미사참례도 하고 젊은 부부가 도착할 무렵에는 알베르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본 젊은 부부가 그라시아님과 함께 바에 들어간 거라며 오늘 새벽부터 지금까지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느라 바쁘다. 뭣하러 그리 이른 새벽에 출발을 했는지, 도시에 진입하고 나서는 길을 못 찾아 헤맸었다며 이럴 줄 알았으면 전날 젊은 부부가 멈출 때 같이 멈출걸 괜히 욕심부렸다며 지난 소회를 맘껏 풀었다. 어쨌든, 이제 까미노에서는 영영 못 만나겠다 싶었던 그라시아님을 4일 만에 다시 만났다.
그라시아님과 젊은 부부 모두 같은 층에 배정받아 침대 정리를 한 후 동키서비스 보낸 배낭을 기다리는데 영 소식이 없다. 나중에 젊은 부부의 남편이 알아보고는 이곳 알베르게에서는 동키서비스를 받지 않아 인근에 있는 호스텔로 배낭을 보냈으니 그곳에 직접 가서 배낭을 찾아와야 함을 알려준다. 기다리는 동안 또 아까운 시간이 그냥 지나갔다. 남편이 그와 함께 배낭을 찾으러 간 후 점심식사 할 장소를 알아보니 그 호스텔 근처에 한국식당이 있어 그곳에서 점심 식사하기로 했다.
길을 잘 찾아갔으나 남편은 한참 만에야 식당 앞에 배낭을 들고 나타났다. 기다리는 동안 그라시아님이 식사를 하고 나오셨다. 남편은 바로 옆에 버스터미널이 있어 내일 일정 관련하여 살펴보느라 늦었다고 하는데, 마침 우리가 문 앞에 서자마자 문 닫을 시간이 안되었는데도 셔터가 내려졌다. 결국 우린 점심을 못 먹고 돌아섰고, 바로 식사하러 오시는 70대 어르신 멤버를 다시 만났다. 그분들도 한국음식이 그리워 찾아왔는데 예정보다 일찍 문을 닫아 대단히 아쉬워하셨다.
그럭저럭 3시간이 흘렀다.
바욘에서 비아씨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우린 부르고스에서 하루 더 묵으면서 빌바오에 다녀오기로 했었다. 그저 주어진 일정대로 걷기만 하던 단순한 일상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 교통편과 다음날 숙박할 곳을 알아봐야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부담이 컸다. 그렇지만 누가 와서 도와주지 않을 상황이니 기필코 우리가 꼭 해내야 한다.
점심을 패싱 당하고 난 후 근처에 있는 터미널에 앉아 우선 호스텔 예약부터 했다. 다행히 터미널 옆 호스텔에 예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버스표 예매, 빌바오행 버스를 알아보니 새벽 6시 30분 버스 이후엔 10시 넘어 버스를 탈 수 있어 당일치기 여행을 하려면 반드시 새벽차를 타야만 했다. 문제는 알베르게 오픈시간이 새벽 6시 30분인데 카페에 알아보니 옆문으로 나가면 퇴실이 가능하다 하여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부르고스-빌바오 (am 6:30, pm 4:15) 왕복 티켓 예매 완료, 그리고 구겐하임 미술관 입장권(11시) 예매까지 완료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 짐정리하고 6시 전에 나가기로 하고 배낭은 터미널 물품보관소에 1유로 넣으면 보관할 수 있으니 그리하기로 했다. 어쨌든 중요한 과제를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니 뭔가 뿌듯하다.
다시 점심 먹을 장소를 찾다가 그냥 간단하게 요기하고 저녁식사를 제대로 하기로 했다. 순례 중 식사가 부실해 제대로 힘을 내어 걷기 힘들 것 같은데도 아침이 되면 힘이 나는 게 참 신기하다. 부르고스 대성당 앞 광장을 지나 알베르게로 돌아와 대충 점심을 먹고, 그제야 씻고 대충 빨래도 해 널었다.
저녁식사 장소를 찾던 중 점심에 일찍 문 닫았던 한국식당 주인이 몸이 안 좋아 저녁 오픈을 안 하기로 했다가 다시 오픈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간 맞춰 가보기로 했다. 아마도 우린 한국음식이 많이 고팠던 모양이다.
이래저래 시간이 지체되어 부르고스 대성당 관람은 패스하고 외관만 구경하기로 했다. 미사도 내일 저녁미사로 대체하기로 하고, 한국식당 오픈시간에 맞춰 거리를 둘러보며 식당으로 갔다.
작은 공간에 테이블이 몇 개 안 되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식사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으로 저녁식사를 했는데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우리 음식인가? 와인과 맥주를 곁들여서 맛있게 먹었다.
이 식당에서 벨로라도에서 같은 방에 묵었던 청년 셋과 어르신 둘을 모두 만났다. 이렇게 만났다 헤어졌다 하는구나. 같은 길을 걸으니 가능한 것이다.
식당 주인의 말로는 부르고스가 고원지대라 기온이 낮다고 했다. 구름이 걷히고 간간히 파란 하늘을 내보이지만 하루종일 추운 날씨다.
알베르게 시설은 참 좋으나 한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이 많아 다양한 소음을 내는 통에 아마도 잠들기는 힘들겠다.
옆 침대 2층에 머무신 분은 대단한 코골이에 앓는 소리까지 내셨다. 게다가 침대등까지 켜놓고 주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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