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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산티아고 순례

[까미노 30.] 'ALTRI NON' 길 위에서는 누구나 같은 순례자 | 240603

by 바이올렛yd 2025. 3. 21.

빨라스 데 레이(Palas de Rei)에서 아르수아(Arzua)까지  29.5km 
7시간 20분 소요 (am 6:00 ~ pm 1:20)


2024년 6월 3일 월요일
 
전날 잠꼬대하던 청년이 우리 방에 들어왔나 보다. 같은 소음을 이틀째 들으며 시달리다가 잠깐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5시 30분이다.  신기하게도 꼭 그 시간에 깨어 시간을 확인하게 된다. 주섬주섬 준비해 나와 주방에서 간단하게 요기하고 6시에 출발했다. 
횡단보도를 건너 야고보성인의 동상을 지나 도시를 빠져나오는 데에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에 달이 손톱달로 변해 있다. 
오늘은 진이의 회복과 엄마의 건강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순례길에 주님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며 묵주기도 20단을 봉헌했다.

 
어두운 숲길을 통과해 얼마 걷지 않아 작은 마을이 나왔다. 마을 한가운데 묘지가 조성되어 있는 게 꽤나 자연스러운 광경이지만 우리나라의 풍습에 비춰보면 대단히 놀라운 광경임엔 틀림없다. 나 역시 뭐 어때? 하며 괜찮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쳐해 지면 거부할지도 모를 일이다.

 
마을을 뒤로하고 마냥 서쪽을 향해 걷다 보면 해가 뜨고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다. 조용한 새벽, 자연이 들려주는 싱그러운 소리를 들으며 걷는 이 길을 걷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제자리로 돌아가야 함에 더 큰 아쉬움이 있는 거라 생각하며,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온전히 느끼고 싶어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걷게 된다.

 
묵주기도가 끝날즈음 앞에 혼자 걷고 있는 그라시아님이 보인다. 까사노바 마을에 들어서며 바에 들어가는 그라시아님을 따라 우리도 들어갔다. 잠시 후 독일청년이 또 따라 들어온다. 함께 앉아 빵과 커피, 우유를 먹고 은영씨 이야기를 했다. 오늘 걸을 구간이 짧아 천천히 출발한다 하여 그라시아님이 먼저 나오셨다 했다. 새로운 다짐을 하듯 떠나온 젊은 청년들에게 큰 용기를 북돋아주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첫 번째 휴식을 마치고 다시 일어나 출발했다. 언제나 휴식을 취하고 난 다음이 다리가 가장 무겁다. 약 20분쯤 걸어 마을이 나왔다. 아마 레보레이로 마을? 어느 집 울타리에 'ALTRI  NON'이라 쓰여있다. 분명 순례자를 위한 메시지일 거라 생각하여 찾아보니 철학적 의미로 '길 위에서는 누구나 같은 순례자' '나와 남은 다르지 않다'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레보레이로 마을에는 성당과 관련한 전설이 있었다. 원래 성당자리에 낮에는 신비로운 향을 풍기는 샘물이 솟았고, 밤에는 신비로운 빛이 퍼져 나왔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이 그 주변을 파헤치자 아름다운 성모상이 나와 마을에 있는 성당으로 옮겼는데, 매일같이 같은 자리에서 계속 성모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 샘터에 새로운 성당을 짓고 샘터에서 발견한 성모상과 똑같이 생긴 성모상을 만들어 성당의 아치형 문 팀파눔에 놓기로 했다고 한다. 그 이후 성모상은 움직이지 않고 제단 뒤에 계속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어두운 밤 아무도 없을 때 성모님이 샘물에 나타나 목욕을 하고 머리를 빗는다는 전설을 믿고 있다고 한다.

 
성당을 지나면 길 옆에 짚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은 구조물이 있는데 이는 '가난한 이들의 오레오'로 '까베세이로'라고 한다.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든 전통적인 곡물보관창고로, 버드나무를 엮어 광주리를 올리고 짚으로 덮은 형태다.
 
함께 걷던 그라시아님이 갑자기 가방에서 복숭아 하나를 꺼내어 주신다. 과일이 싸고 좋아 욕심을 부려 한 무더기 샀다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는데, 내게는 한 번도 나눠주지 못했노라 하신다. 납작 복숭아보다는 확실히 맛이 덜했지만 고맙게 받아먹었다.

 
너른 잔디밭에 군데군데 자유롭게 꾸며놓은 장식물들이 주인장의 안목을 가늠할 수 있겠다. 단순하고 자유롭지만 나름 조화롭게 정돈된 느낌이다. 

 
거의 멜리데에 도착할 무렵 음악소리가 난다. 다리를 건너 코너를 도는데 어떤 청년이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아름다운 선율에 귀가 즐거운 것도 잠시, 나이 든 여자분이 반대편에서 걸어오며 청년에게 무어라 퉁명스럽게 말하는데, 그 청년의 엄마가 하지 말라 하시는 걸까? 아님 마을 주민이 시끄럽다 하시는 걸까? 나름대로 추측해 봤다. 

 
거대한 벽화가 인상 깊게 다가온다. 이시드로 파르도, 아마 스페인의 유명한 양봉인인가 보다. 벽화 설명을 해석해 보면 '저는 인간 벌집을 만들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벌처럼 뭉쳐있다면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될 것입니다.'

 
바에서 나와 먼저 간 독일청년이 또 다른 한국인청년과 함께 뽈보집 앞에 서있다. 멜리데의 유명한 뽈보집이라며 함께 들어가자 한다. 전날에 이어 은영씨가 빠진 넷이 뽈보를 주문해 맥주와 함께 먹었다. 시간은 9시 반. 새벽부터 따져보면 세 번째 아침 식사다.

 
스페인의 서쪽 대서양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문어를 통해 알 수 있게 되는 건지 이곳 갈리시아지방엔 문어요리가 흔한 요리인가 보다. 국내에서 먹는 문어도 맛있지만 이곳 갈리시아지방의 문어요리는 대서양의 차가운 바닷물에서 자란 문어라서 더욱 쫄깃하고 맛있다고 한다.

 
멜리데 외곽 길가에 있는 산타마리아 성당 입구에 일본남자분이 서 있다. 사리아 이후 처음 만나는데 여전히 꾸준하게 잘 걷고 계시다. 성당은 작고 아담했다. 남편과 함께 무릎을 꿇고 십자성호를 그었다. 제단 위 십자고상 뒤로 밝은 빛이 들어와 신비롭게 느껴진다. 

 
풀밭 가장자리에 장미꽃이 우물을 장식하듯 피어있고 이미 폐허가 된 집조차도 꽃들이 어우러져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50km 남았음을 알리는 표지석을 지나 숲길로 들어섰다. 졸졸 흐르는 물 위로 놓인 바위로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길은 한적하고 시원하다.

 
멜리데를 떠나 두 시간쯤 후에 마을이 나왔다. 많은 외국인들이 빠에서 음식을 먹고 있는 게 보여, 잠시 쉬었다 갈까 생각했지만 오늘은 거리상 쉬어갈 만한 여유가 없다. 

 
몇 번을 마을을 오르내리다가 드디어 아르수아에 도착했다. 

 
거의 30km를 걸었기에 평소보다 좀 늦은 시간인 1시 20분경 알베르게에 도착. 침대는 배정해주지 않고 선착순으로 본인이 원하는 침대를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이미 벙커침대 1층은 대부분 차지했고 벙커침대 하나 찾았는데 주변에 외국인 할아버지 두 분과 그중 한 분의 아내로 보이는 여자분이 침대에 걸터앉아 서로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누군가 벗어놓은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했을 가죽샌들에서 냄새가 심하게 나 엮겹기도 했다.

 
우선 씻고 세탁기 돌려 빨래해 널고 밖에 나가려던 참에 창가 구석진 곳 침대가 비어있는 걸 발견하여, 침대를 바꿔버렸다. 신경 쓰이던 것이 해소되어 한갓지니 좋다. 

오전에 두 번이나 빠에 들러 음식을 먹었기에 배가 그다지 고프지 않았으나 남편이 밖에 나가 밥 먹고 들어오자 한다.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을 찾아 들어갔더니 한국인 남자 두 분이 음식을 주문해 놓고 앉아있었다. 우린 뽈보 한 접시랑 피자 한판, 그리고 맥주 두 잔을 주문해 먹었다. 남편은 뽈보에 완전히 빠져버렸나 보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물 두병, 주스 세 개 묶음, 우유, 체리, 블루베리, 빵 두 개 사가지고 들어오면서 마른빨래 걷어다가 정리했다. 정말 단순한 삶이다. 
 

 
이틀 후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 연이는 산티아고 입성을 축하하며 산티아고에 있는 한식집을 예약해 준단다. 

7시 반쯤 우유에 시리얼과 블루베리 섞어 저녁식사 하고 8시경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10시가 넘어야 해가 지니 누워있어도 잠은 안 오고, 옆 침대 뚱뚱한 남자는 계속 움직여 침대는 삐그덕거리고 나중에는 푸푸 거리며 자고 있다. 벽체너머에선 아가씨가 벽체가 흔들릴 정도로 소란스럽다.
 
그럼에도 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