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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산티아고 순례

[까미노 28.] 산티아고까지 100km, 끝까지 무탈하게. | 240601

by 바이올렛yd 2025. 3. 9.

사리아(Sarria)에서 뽀르또마린(Portomarin)까지  23km 
5시간 20분 소요 (am 6:00 ~ am 11:20)


2024년 6월 1일 토요일
 
사리아에 가면 무조건 막달레나 수도원 알베르게로 들어가야겠다 생각한 것은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란 점에 대한 신뢰감 때문이었을 거다. 역시 조용하고 나름 쾌적하고 시설도 좋았는데 시내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아마 빈자리가 많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조용한 가운데 잠을 자고 일어나 짐을 꾸려 주방으로 갔다. 주방에 있는 자판기에서 팬케이크 두 개를 구입하여 전날 사뒀던 요플레와 우유를 함께 먹었다.

 
새벽 6시. 다시 어둠을 뚫고 출발했다.  전날 길을 잃고 내려가던 내리막길로 내려가니 어두워서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리아를 지나면 순례자들이 급격히 많아져 순례를 막 시작하는 말끔한 차림의 순례자들이 무리 지어 걷기에 불편함이 생기기도 한다 했는데, 이른 시간이라 여느 때처럼 드문드문 순례자들이 보일 뿐 조용하다.

 
맑은 하늘에 바람은 선선하다. 놓치고 싶지 않은 이른 아침 순례길에서 만나는 하늘이다. 태양의 기운을 듬뿍 담은 붉은 하늘 반대편에 하얀 조각달이 떠있다. 

 
 6시 40분경 바르바델로에 도착했다. 연이는 사리아를 지나쳐 이곳에서 묵었다고 한다. 아침풍경이 아름다운 조용한 동네였다. 길가에 있는 작은 알베르게 옆에 순례자들의 신발이 나란히 예쁘게 놓여있었다.

 
요 며칠 평탄치않은 길을 걸었던 탓인지 비교적 완만한 길이 가뿐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말 목장에 말이 지나가는 우리를 멀뚱히 바라보는 모습이 귀엽다. 넓은 들판의 자유로운 환경이 동물들에게도 안정감을 주는 거겠지. 

 
양쪽 길가 나뭇가지가 서로 만나 동굴을 이룬 길에 간간이 비치는 아침햇살이 아름답다. 

 
바르바델로 마을을 지난 지 거의 한 시간 반 만에 마을이 나왔다. 담장 한편에, 대문 위에 높이 세워진 긴 직육면체모양의 건축물은 갈리시아 지방으로 넘어와 처음 보는 것이다. 갈리시아지방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곡물저장고 '오레오'라고 한다. 바람이 잘 통하게 하기 위해 벽돌사이 틈을 만들어 높게 설치한 모양이다.

 
앞서 걷던 순례자들이 빠 앞에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우리와 비슷하게 출발했지만 다리 긴 서양인들은 뚜벅뚜벅 우리를 앞서가더니 벌써 도착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인사하고 우린 빠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빵과 커피, 주스를 주문했다. 두 번째 아침식사다.

 
우리가 다시 출발할 때까지도 그들은 마냥 쉬고 있었다. 걸음이 빠른 만큼 휴식시간도 길게 가질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다리 짧은 동양인들은 묵묵히 꾸준히 걸을 수밖에 없다는 합리적 결론을 내렸다. 우린 절대 땅만 보고 걷지 않는다. 다만, 다리가 짧아 천천히 꾸준히 걷는 거다.
 
빠 옆에 있는 작은 경당에는 많은 순례자들의 염원이 담긴 물건들과 함께 짧은 단어들이 적혀있다.

 
길 한편으로 얕은 물이 졸졸 흐르는 돌판길을 지나 제주도 현무암 돌담길을 닮은 길을 지나니 페레리오스 가는 길을 표시하고 있는 이정표가 나온다.

 
사리아를 출발지점으로 선택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이유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전코스 완주가 어려운 경우, 100km 이상 걸어야 산티아고 순례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리아를 출발해 11km 이상 걸으면 산티아고를 100km 앞둔 지점의 표지석이 나오는데, 길옆에 100.757km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 옆에서 잠자고 있는 강아지가 깰까 봐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강아지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이미 익숙해 무던해져 있는가 보다.

 
내리막길이 나오고 지나온 빠에서 여럿이 함께 쉬고 있던 캐나다 여자가 성큼성큼 달려 우리를 앞질러간다. 오늘도 그녀는 등이 가볍다.

 
내리막길 한편에 기부금을 넣고 쎄요를 찍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자칫 쎄요 찍을 칸이 부족할 수도 있어 그냥 지나쳤다.
 
캐나다 여자와 앞서 걷던 여자가 멈춰 서서 이리저리 사진 찍고 있다. 드디어 100km 표지석이다. 그분들 사진을 찍어주고 우리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키 큰 캐나다 여자는 우리 사진을 찍어주고는 엄지 척을 날리며 긴 다리를 자랑하듯 또 앞질러 나갔다.

 
남은 거리가 두 자릿수로 바뀌면서 끝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아쉬움이 밀려온다. 정해진 인생길을 걷다가 잠시 궤도 이탈하여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내 인생의 한 조각이 섬처럼 떨어져 나온 이 기회가 부디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남은 길을 잘 마무리해야겠다 묵묵히 다짐했다. 

 
주인을 따라 나왔는지 밭 둔덕에 앉아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개의 표정, 우리 곁을 무심히 지나쳐가는 개의 발걸음, 폐허처럼 보이는 낡은 집 담벼락에 앉아 우리를 내다보고 있는 고양이의 눈빛에서 정서적 안정감을 찾아볼 수 있는 건 그저 그들이 행복할 것이다 판단해 버린 탓일지 모르겠다. 원래 어릴 적부터 개가 무서워 개 있는 친구집에 놀러 가는 게 싫었던 나로선 개들이 짖지 않는 것만으로도 착하고 유순해 보인다.  

 
멀리 뽀르또마린이 보이는 곳에 길이 양갈래로 안내되어 있다. 오른쪽길은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일 것 같아 왼쪽길을 선택했다. 멀리 걷고 있는 순례자를 보고 내린 결정이기도 했다. 

 
납작 복숭아 하나씩 베어 먹으며 돌을 쌓아 건축한 집들 사이를 지나 밀밭 사잇길을 걸었다. 단물이 지친 발걸음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다.

 
어느 순간 길이 없는 것 아닌가 싶게, 좁은 돌담 사이로 울퉁불퉁 험한 바위길에 경사도 심한 내리막이다. 비가 내리는 경우에는 미끄러져 낙상사고가 나기 딱 좋을 험한 길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우회로를 안내해 놓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험한 길을 통과하여 내려오니 도로가 나오고 바로 앞에 강물이 흐르고 있다. 강 건너 보이는 뽀르또마린이 푸르른 미뉴강과 어우러져 상쾌하다. 좁고 긴 다리를 건너 뽀르또마린으로 이동하는 중 바로보이는 강물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수십 개의 계단으로 이뤄진 오르막이 나타났다. 목표를 목전에 두고 고비를 넘어야 하는 시험대처럼 높다란 계단을 걸어 올라 아치형 문을 통과하니 포상처럼 별모양 포토존이 있다. 

 
도시로 들어가는 관문을 통과, 비로소 뽀르또마린임을 알리는 텍스트조형물이 서있다. 도시 입구 언덕에 십자고상이 서있고 건물 외벽에 성수대 모양 우물을 보며 이마에 성수를 찍고 도시로 들어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게 늘어선 건물의 회랑을 지나 도시의 끝쪽에 알베르게가 자리하고 있다. 알베르게 앞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중 우리에게 손짓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라시아님과 전날 알베르게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던 한국아가씨였다. 정말 5시에 출발했는지 도착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한다. 

 
도착시간 11시 20분. 체크인까지는 1시간 40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빛이 잘 드는 곳에 신발 벗어 나란히 말려놓고 자리를 잡고 앉아 다음 일정을 검토했다. 며칠 후 산티아고 입성을 앞두고 있으니, 도착 후 연박할 알베르게를 찾아 우선 예약했다. 혹시 일정이 변경될 경우 3일 안에 취소가 가능하다고 하니 안심이다. 
 
공립 알베르게 호스트가 출근을 하고 오후 1시가 되어 알베르게 문이 열렸다. 그라시아님은 우리 보고 어차피 일찍 도착하였으니 불편하게 벙커침대 1,2층 쓰지 말고 1층을 써보라 하신다. 아무튼 빈침대가 많아 1층을 나란히 차지할 수 있어 다행이다. 사리아 이후로 알베르게 구하기도 힘들 거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침대를 정리하고 씻고 세탁까지 마치고 나니 오후 2시가 훨씬 넘었다. 늦은 점심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가 회랑을 지나 성당 앞 광장 건너편에 있는 빠로 들어갔다. 낯익은 한국인 부부가 먼저 와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15유로짜리 순례자 메뉴를 주문하고 야외 빠에 앉았다. 햇빛은 좋으나 간간히 바람이 휙 지나가는 바람에 정신이 없다.

 
햇빛이 따가워 눈을 뜰 수 없을 텐데 서양인들은 햇빛에서도 잘 앉아있다. 선글라스를 기본으로 쓰고 있어 가능한 일인지.

 
마트에 가서 납작 복숭아 4개, 물 한병, 시리얼, 우유, 요플레 두 개 사가지고 들어오니 그라시아 님이 한국인 아가씨 두 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레온 이후 길에서 자주 만났던 아가씨는 레온에서 3박을 했는데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했고, 전날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아가씨는 레온에 대한 느낌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했다. 각자 느낌은 다를 수 있지.

서로의 이야기를 부담 없이 나눌 수 있는 게 같은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공통점에서 오는 친밀감이 아닐까 싶다. 그라시아님과 같이 걸으면서도 그 스토리가 서로 달라 기억을 맞춰보기도 하면서, 긴 순례기간 동안의 기억들이 채 정리되지 않아 뒤죽박죽 섞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정에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정리의 시간이었다. 

 
저녁 7시 미사시간에 맞춰 그라시아님과 함께 성당으로 향했다. 다음날 주일미사를 할 수 있을지 몰라 작정하고 갔는데 한국사람들이 제법 보였다. 앞으로 남은 일정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기를, 오늘 이야기를 나눈 그들에게도 축복이 있기를 기도했다. 

갈리시아지방 알베르게에 주방에 조리도구가 없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이곳 알베르게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뜨레야카스테야에서 샀던 플라스틱 스푼을 가지고 있어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먹을 수 있었다. 2층에서 계단을 통해 내려온 한국인 청년이 우리 테이블에 합석해도 되냐 묻는다. 반가워 인사 나누며 함께 앉아 그 청년도 간단히 저녁식사를 했다. 치즈 두 조각을 주면서 먹으라 하기에 나도 납작 복숭아 하나 주면서 후식으로 먹으라 했다. 부산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독일 유학 중이라 한다. 5월 6일부터 걷고 있다는 말에 혹시 바욘에서 만났던 한국인 할아버지가 떠올라 혹시 길에서 만났는지 물었더니 바로 기억을 했다. 친화력이 좋은 청년이다. 
나중에 합석한 그라시아님도 함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 나누다 침실로 올라와 짐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역시 벙커침대는 우리가 아래위를 함께 쓰는 게 더 낫다. 위층에 올라간 사람이 꼼짝 않고 있지 않을 바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