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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산티아고 순례

[까미노 32.]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 240605

by 바이올렛yd 2025. 4. 14.

오 뻬드로우소(O Pedrouzo)에서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Santiago de Compostela)까지  20.5km 
4시간 30분 소요 (am 5:30 ~ am 10:00)


2024년 6월 5일 수요일
 
새벽 4시. 이른 새벽부터 부스럭거리기 시작한다. 산티아고를 목전에 두고 긴 잠을 청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하여 산티아고 대성당 미사에 참여할 수 있는 기쁨의 순간을 맛보기 위함일 수도 있겠다. 우리도 5시경 일어나 떠날 준비를 하고 다소 이른 5시 30분에 출발했다. 밖은 아직 까맣다. 

 
그동안 매일 길을 나서며 바친 묵주기도의 힘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진이의 회복과 더불어 그동안 이 길을 걸으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응원해 준 모든 분들을 기억하며 기도했다.
 
마을을 빠져나와 어두운 숲길로 들어서자 앞이 어두워 걷기가 힘들다. 휴대폰 불빛과 간간이 들리는 앞선 이들의 발걸음 소리와 희미한 불빛에 안도하며 걸었다. 어슴프레 앞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라시아님이 길을 비춰주며 외국인 할아버지와 길동무하며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방해하지 않으려 속도를 맞추어 거리를 유지하며, 거의 한 시간 이상을 그렇게 걸었다.

 
길을 걸으며 생각했던 많은 상념들이 스쳐 지나갔다. 때론 남편의 밉상이 그대로 나타나 짜증이 날 때도 있었고, 어쩌면 정말 소중한 인연일 수도 있는 길 위의 사람들이 번거롭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온통 홀로이고 싶고 방해받지 않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려나. 그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 모든 것은 나로부터 비롯된 생각들일뿐, 그 어떤 것도 외부로부터 오는 건 없었다.
예전에도 그랬었겠지.
나의 짜증스러움이 남편으로부터, 때론 아이들로부터 왔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나도 선한 면이 있거든. 그들이 나의 마음을 몰라줄 때도 있었거든.

 
날이 밝아지고 산티아고 공항 주변을 걸을 때 외국인 할아버지는 우리와 다른 길로 가고 우리가 뒤로 쳐지면서 그라시아님도 앞서 걷게 되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7시 무렵 해가 떠오르고, 아직 이른 시간이라 순례자들의 발걸음 소리만 가끔 들린다.

 
이제 10km 남았다. 

 
산티아고 길 주변에 붙어있는 현수막에 종합개발계획을 반대한다는 의미의 문구가 적혀있다. 순례길의 전통적인 분위기를 해칠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아닐까?

 
10km 이상 걷다 보니 드디어 바가 나타났다. 걸어오면서 사과를 먹었더니 견딜 만 해 그냥 걷기로 했다. 앞서 걷던 그라시아님은 우리에게 손짓을 하고 바로 들어갔다.
 
100km 표지석에서 사진 찍어줬던 캐나다 여자는 오늘도 가벼운 차림으로 달린다.

 
멀찍이 보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안개가 자욱하다. 산티아고 공립알베르게 단지가 보이고 제주 올레와 산티아고 순례자협회와 협약을 맺은 우정의 길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키로수가 적어질 때마다 곧 도착할 산티아고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 사진으로만 봤던 그곳. 이렇게 꿈이 일찍 이루어질 줄은 미처 몰랐다.

 
산티아고 초입에 접어들면서 사리아에서 만났던 상촌성당에서 온 아빠와 딸 순례자를 만났다. 딸은 씩씩하게 앞서 걷고 아빠는 뒤에 쳐져 걸으며 너무 힘들었다고 말씀하신다. 이제 닷새 걸었으니 힘이 들기도 할 것 같다. 어쨌건 산티아고 입성을 축하드린다 말씀드리고 그들을 앞질렀다.

 
뿌연 하늘에 성당 종탑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들 한 곳을 향하여 바쁜 걸음을 내지른다.

 
성당을 향한 골목길을 걷다가 독일청년을 만났다. 아침 일찍 도착해 인증서를 받는 바람에 파라도르 호텔식사권까지 받았다고 한다. 선착순 10명에게 준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팬플룻 연주소리가 들리고 아치형 문을 통과하니 산티아고 대성당과 함께 드넓은 광장이 눈앞에 펼쳐진다.
오전 10시 도착. 생장부터 799km. 32일간의 산티아고를 향한 걸음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다.

 
감동이 밀려오는 순간이지만 우선 인증서를 발급받으러 순례자사무실을 찾아갔다. 대기줄이 제법 길었지만 시간이 그다지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 순례자사무실에 근무 중인 한국인 여자가 말을 걸어와 반갑게 인사도 했다.


순례인증서를 받아 밖으로 나오니 상촌성당의 아빠와 딸이 막 도착했다. 반가이 맞아주며 0km 지점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줬다. 딸도 우리에게 기념사진을 축하의 선물로 찍어줬다.

 
그라시아님이 도착한 걸 보고 우린 광장으로 올라왔다.
 
연이가, 언니랑 조카가 완주의 기쁨으로 기뻐했을 그 자리에 우리가 서있다. 

 
완주증을 받고 광장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순례 중 보아온 청년들과도 인사하고 캐나다에서 온 아가씨와 사진도 찍었다. 그녀의 폰으로도 사진을 찍겠다 해서 같이 찍었다. 좋은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을 수 있기를. 

 
덩그러니 누워있는 깜찍이 아가씨와도 인사하고 그들의 모습을 허락 없이 동영상으로 담아뒀다.

 
산티아고 대성당 정오에 시작하는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 참여하려면 배낭을 가지고 들어갈 수가 없기에 순례자 사무실 캐비닛에 배낭을 맡겨놓고 성당으로 향했다. 쉬지 않고 걸었기에 배낭 속에 있는 체리봉지를 꺼내보니 많이 짓눌려 있다. 

 
대충 먹을만한 것만 골라 먹은 후 쓰레기 처리하고 성당으로 향하니 그사이 줄이 꽤 길게 늘어서 있다. 일찌감치 줄을 섰어야 했는데 너무 여유를 부렸나 보다.

 
대성당 안에는 그새 사람들로 가득 차 우리가 앉을만한 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측면에 있는 자리를 잡아 앉아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가 시작되고 평화의 인사를 하면서 뒷자리에 앉은 남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미사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렸다. 각자의 사연은 다르겠지만 모든 걸 딛고 이겨낸 진정한 순례자들의 눈물이었다. 

 
미사가 끝나자 사람들이 중앙제단 왼편에 줄을 섰다.  측면에 있는 자리라서 우리도 바로 줄을 설 수 있었다.
지하묘소로 들어가는 줄이었다. 야고보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곳을 천천히 지나며 마음이 숙연해졌다. 

 
다시 계단을 따라 올라가 야고보 성인상의 뒤편에 서서 야고보 성인의 어깨에 손을 살짝 얹었다. 야고보성인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너도 잘 걸어왔구나 하며 위로하는 느낌? 짧은 순간이지만 뜨거운 감동이 밀려왔다. 

 
그 유명한 산티아고 대성당의 향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최근에 수리를 하는 바람에 특별한 날에만 분향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쩔 수 없다. 대신 연이를 통해 언니를 통해 듣고 보았었다.

 
미사를 마치고 나서 그라시아님과 한식당에 가서 점심식사하기로 했다. 성당에서 따로 떨어져 앉는 바람에 미사를 마치고 만나지 못해 차라리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다. 꽤 먼 거리를 걸어 우리 음식을 먹으러 갔다. 비빔밥과 두루치기를 먹었다. 꿀맛이다.

 
이제 배낭을 찾아 알베르게로 돌아가야 하는데 다리가 너무 무겁다. 목적달성 후 오는 급피로감이다.

 
알베르게는 성당에서 꽤 멀게 느껴졌다. 배낭 메고 언덕길을 다시 올라 숙소까지 오려니 참 힘들다. 약 20분 정도 걸은듯한데 추적추적 늘어져 걸으며 스스로에게 웃음이 났다. 우리 800km를 걸어왔잖아.

 
알베르게는 예전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고 하는데 규모가 제법 컸다. 학생들이 단체로 들어왔는지 한때 로비가 시끌시끌했다. 3층에 있는 7인실 구석진 창가 자리에 침대가 배정되었다. 창밖으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이 보인다.

 
빨래를 모두 모아 3.5유로를 넣고 세탁기 돌려 널어놓고 쉬다가, 6시경 밖으로 나갔다. 

 
지름길을 이용해 콤포스텔라 성당 쪽으로 가다 보니 관람차가 있는 공원이 나온다. 사람들이 많이  나와 쉬고 있었다. 

 
대성당 첨탑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광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순례의 기쁨을 몸으로 표현하듯 각자의 자세로 즐기고 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사진 찍고 있는데 지예 닮은 아가씨가 갑자기 나타났다. 산티아고 사무실 근처에 숙소를 정했다 한다. 선뜻 사진을 찍어주겠다 하여 아가씨 덕분에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을 얻었다.

 
팬플룻을 연주하고 있는 광장 옆 아치형 문을 지나 다시 점심 먹었던 한식집으로 갔다. 저녁은 연이가 예약해 줬다.

 
한식집 예약시간이 조금 남아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 청년 셋이 걸어온다. 가만 보니 벨로라도 알베르게에서 같은 룸을 이용했던 청년들이었다. 그 이후로 부르고스 한식집 소풍에서도 만났었는데 또 만났다.
 
반가워 인사하며 혹시 신학생이 아닐까 하며 남편과 이야기했었다고 했더니,  진짜로 신학생이라 한다. 대학원 과정 들어가기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섰다 한다. 요셉, 스테파노, 요아킴 학사님들 좋은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겠노라며 함께 사진 찍어도 되겠냐 했더니 흔쾌히 괜찮다 했다.

 
학사님들 덕분에 순례마무리에 또 한 가지 에피소드를 남겼다.
두루치기와 김치찌개로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다시 언덕을 넘어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구름이 다소 끼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성당 풍경이 멋지다.

 
그사이 우리 방에 두 명이 더 들어와 6명이 함께 잔다. 그동안의 알베르게에 비해 상당히 좋은 상황이지만 조용했으면 좋겠다. 그라시아님은 1인실을 구했던데, 우리도 순례 마무리의 달콤한 휴식을 위해 그렇게 할 걸 그랬다.
 
연두와 봉려리의 순례는 끝난 게 아니지만, 오늘로써 프랑스길 대장정은 끝이 났다.
 
우리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네요.
참 잘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