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수아(Arzua)에서 오 뻬드로우소(O Pedrouzo)까지 19.5km
4시간 55분 소요 (am 6:15 ~ am 11:10)
2024년 6월 4일 화요일
새벽 4시가 넘어 잠이 깨어 휴대폰을 보니 진이가 조금 회복되어 퇴원했는다는 소식이 올라와있었다. 우리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내심 많이 걱정되었는데 그래도 음식을 삼킬 수 있고 가스도 나온다니 정말 다행이다. 아직 기력이 없어 걷지는 못한다고 하는데 조금만 더 힘내기를...
오늘은 걷는 거리가 짧아 좀 늦게 출발하려 했지만 좀 더 여유를 부린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주방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떠날 준비를 한 후 6시 15분경 출발했다.
알베르게 현관에 그라시아님 신발과 스틱과 모자가 있는데 그라시아님 배낭이 아닌 것 같아 둘러보니 안 보인다. 오늘도 어김없이 어둠 속을 뚫고 먼저 출발했나 보다.
아침공기는 상쾌하고 알베르게 지붕 위로 손톱달이 빛나고 있다. 진이가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일상을 찾을 수 있기를 소원하며 진이와 진이 가족을 위해, 또 우리의 순례를 잘 마무리하기를 기원하며, 엄마와 내 형제들, 시댁 형제들 가족과 우리 아이들 모두를 위해 묵주기도 20단 봉헌했다.
묵주기도를 마치고 난 후 뒤돌아 동쪽 하늘을 바라보니 오늘따라 붉은 기운을 가득 품은 채 해가 떠오르고 있다.
담벼락에 그림과 함께 그에 대한 설명이 각국 언어카드로 붙어있다. 배에 구멍이 나 물이 새어 들어오니, 한편에서는 열심히 물을 퍼내고 있는데 반대편에 두 사람이 한갓 지게 앉아서 자기들 쪽에 구멍이 나지 않아 다행이라 말하고 있는 그림이다. 함께 하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을 간과한 어리석은 인간을 표현한 것 같은데, 넓게 생각하면 우리가 사는 지구도 다르지 않다.
그라시아님이 보일 시간이 되었다 생각하며 둘러보니 정말로 홀로 걷고 있는 그라시아님이 보인다. 바에 들어가는 그라시아님을 보며 우리도 따라 들어가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커피와 우유, 쵸코우유를 주문해 배낭에 들어있는 먹다 남은 빵을 꺼내어 함께 먹었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드니 순례를 마치고 난 후의 각자 다른 여정을 계획하느라 생각이 많다. 고요한 호수에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는 것처럼.
깔사다를 지나 깔레로 향하는 길에 말끔한 곡물창고 오레오를 이용해 간판을 설치한 호텔이 있다. 처음 갈리시아 지방에 접어들면서 보게 된 오레오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된 지 오래라 신기함보다는 전통적 오레오를 호텔의 상징처럼 사용했다는 데에 더 눈길을 끌었다.
순례자들의 신발을 이용해 다육식물을 근사하게 키워 장식한 시골집 앞을 지나며 그라시아님은 지난해 가을 순례길을 추억했다. 지난가을엔 지금 이 모습보다 더 아름다웠노라 이야기한다. 아마도 울긋불긋 물든 다육이가 더 예쁘게 느껴졌던 게 아닌지. 버려진 신발을 이용해 식물을 가꾼 정성이 보이는 것 같아 이대로의 모습도 충분히 아름답다.
어느새 6월, 길가에 꽃들도 예쁘고 숲이 싱그럽다.
숲길 옆에 기예르모 와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그는 안타깝게도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 입성을 하루 앞두고 순례 중 유명을 달리했다고 하였다고 한다.
산티아고까지 25.319km 표지석을 지나 바로 보이는 바에 들어가 맥주 한잔씩 마셨다. 갈증이 나던 차라 벌컥벌컥 시원하게 넘어간다.
먼저 들어와 쉬고 있던 노부부가 자리를 정돈하고 출발준비를 하는 걸 보면서 우리도 테이블을 치우고 떠날 채비를 했다. 시원하게 들이켠 맥주 덕분에 다리가 천근만근 무겁다. 딱 자리를 펴고 한숨 자고 나면 가뿐해질 것 같은 나른함이 밀려온다. 그라시아님과 취기를 핑계 삼아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다음날 일정을 이야기했다. 따님이 예약해 준 숙소가 우리와 같은 숙소였다. 덕분에 하루 더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이야기했다.
숲길을 빠져나와 굴다리를 지나니 작은 성당건물이 나온다. 산타 이레네 소성당이라 하는데 성당건물 옆으로 성인의 샘이 있어 순례자들의 피부병과 물집을 치유하는데 좋다고 알려졌다 한다.
이제 3km만 더 가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길에서 만난 토끼는 사람을 보고도 도망치지도 않고, 어느 집 양지바른 잔디밭에 검은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 장난치며 놀고 있다. 평화로운 스페인 시골풍경이다.
꾸준히 걷다 보면 어떻게든 가지는 법이다. 욕심부려 빨리 갈 필요도 없고, 무념무상 그저 물 흐르듯이 쉬지 않고 가다 보면 목적지가 보인다. 이제는 순례길의 고수가 된 듯, 내 누울 자리가 없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다. 갈리시아지방의 알베르게는 늘 여유로웠다.
오전 11시 10분경 오 뻬드로우소 공립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우리 앞으로 지난밤 옆침대를 이용했던 순례자가 먼저와 대기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양말 벗고 발 마시지를 해주며 쉬다가 오후 1시에 체크인했다. 독일청년은 우리보다 10km쯤 더 걸을 예정이라 했지만, 우린 막바지에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알베르게는 청결하고 아늑했다. 침대번호를 적어주었는데 우린 모두 창가의 단층침대로 배정받았다. 그렇지만 오늘도 오 세이브레이로에서처럼 침대만 좋을 수도 있다. 우리 좌우에 지난밤 시끄러웠던 순례자와 나이 드신 외국인 할아버지가 있다.
침대커버 씌우고 배낭 대충 정리해 놓고 밖으로 나왔다. 점심식사하러 그라시아님과 함께 주변에 있는 레스또랑에 들어갔다. 남편은 뽈보 중독인가 보다. 뽈보 한 접시, 오징어 감자튀김을 주문해 빵과 와인을 곁들여 먹었다. 주인장이 우리 보고 맛있냐 묻는다. 좀 짰지만, 대체적으로 유럽음식들이 좀 짜다는 걸 감안해 맛있다며 엄지 척을 날려줬다.
바로 들어와 씻고 빨래해 널었다. 햇빛이 좋으니 밖에 널면 금방 마를 것 같아 남사스럽지만 속옷까지 모두 울타리에 빨랫줄 이용 해 널어 말렸다. 오늘 빨래는 남편이 다해 널었다.
날이 더워 오후시간은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이곳 갈리시아지방 공립알베르게를 대대적으로 단장을 했는지 이곳 알베르게도 시설이 깨끗하고 좋다. 게다가 단층침대로 배정을 해주어 매트리스도 탄탄하고 좋아 잠시 쉬겠다고 누웠다가 내 코 고는 소리에 놀라 깨었다. 나 또한 누군가의 잠을 방해했을 수도 있었겠다. 어쨌든 잠시 잠이 들었다 깨니 한결 개운하다.
7시경 그라시아님 보고 함께 나가 저녁 먹자 했더니 둘이서 좋은 시간 보내고 오라며 마다하신다. 더 캣 리오라는 레스또랑에 가서 먹물 빠에야와 멕시코 음식 나초요리 하나 주문해서 맥주와 함께 먹었다. 빠에야가 더 맛있었다. 점심 먹었던 집과는 달리 손님들이 많다.
산티아고 입성을 앞둔 마지막 만찬이었다.
아쉽지만 이런 단순한 삶도 머지않아 끝날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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