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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산티아고 순례

[까미노 13.] 부르고스 지나 메세타 대평원의 시작.. | 240517

by 바이올렛yd 2024. 11. 8.

부르고스(Burgos)에서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Hornillos del camino)까지  21.5km 
4시간 45분 소요 (am 6:00 ~ am 10:45)


2024년 5월 17일 금요일

그동안 못잔 잠을 한꺼번에 잔 듯 삐그덕거리는 침대에도 불구하고 꿀잠 잤다. 아마 10시경 잠이 들지 않았나 싶은데 남편이 말하길 눕자마자 코를 골며 잤다고 한다. 어쨌든 단잠을 자다 깨어보니 새벽 1시 30분, 꼼짝도 않고 잔듯한 느낌이다. 어쩌면 잠에 취해서 새벽에 못 일어날지도 몰라 5시에 알람 설정해 놓고 다시 잤다. 역시 잠을 잘 자니 개운하다.

편안한 가운데 룸에서 전날 사놓은 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고 배낭을 꾸려 다시 출발준비를 했다. 1층 로비에 동키서비스 봉투를 매단 내 배낭을 한쪽에 놔두고, 리셉션에 아무도 없어 호스트에게 연락을 했다. 이곳은 체크인하면서 5유로 내고 룸키 받고,  다음날 체크아웃하면서 룸키 반납하고 5유로를 다시 환불받아가는 시스템이다. 우리가 일찍 나가는 바람에 5유로는 기부해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그래도 문의를 해보려 전화했더니 뭐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못 받으면 기부한셈 치자 하며 동키 보내는 내 배낭에 넣어달라 메모 남겨두고 6시 넘어 출발했다.

 

새벽에 진이 상태가 안 좋아졌다는 소식을 접한지라 진이를 위해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언제나 묵주기도 20단이 끝날 때까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말없이 새벽길을 걷는다.

부르고스 공립알베르게가 아직 문이 안 열려서 그런지 거리가 한산한 게 순례객들이 평소보다 덜 보이는 듯하다. 이른 아침에 조깅하는 청년들을 만나 아침인사를 했더니 '부엔카미노!'라 외치며 힘을 불어넣어 준다.

 

부르고스를 빠져나오며 남편이 찍은 사진, 흔들림도 예술!

출발 후 한 시간쯤 걸으니 전날 저녁 한국식당에서 만났던 오산에서 온 부부가 묵었다는 부르고스 대학 근처 호스텔이 나왔다. 외진 데에 있어 조용하고 좋았을 것 같지만 빌바오 다녀오기엔 너무 먼 곳에 숙소를 잡았구나 생각했다. 

 

도시를 빠져나오니 걷기 좋은 오솔길이다. 이제야 조금씩 순례자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전날 하루 순례경로를 이탈하여 빌바오를 다녀왔기에 같은 속도로 걷던 이들은 벌써 저 멀리 앞서 있을 것이다.   

 

하늘이 잔뜩 흐리더니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난 히트텍에 패딩에 바람막이까지 겹쳐 입어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남편은 좀 추운 모양인지 우비를 꺼내 입는다.

 

출발한 지 두 시간 20분 만에 따르따호스에 도착했다. 마을입구에 돌을 다듬어 마을지도를 만들어놓은 것이 특이하다.

 

마을에 도착할 무렵 길에서 전날 빌바오를 우연히 동행하게 되었던 어르신 멤버를 다시 만났다. 아침식사를 못하셨는지 바를 찾고 계셨다. 지나가는 동안 바가 하나 있었지만 우린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마을 중앙에 있는 산따 마리아 성당에 들어가 볼까 했지만 문이 열려있지 않았다.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순례길에서 만나는 성당들은 당연히 개방되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담장 틈 사이에서 싹이 터 꽃까지 예쁘게 피었으니 참으로 대견하다. 조건이 나빠 제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투덜거림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마을을 빠져나온 지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마을이 나왔다. 

 

라베 데 라스 깔사다스라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벽화가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끌더니 마을을 빠져나올 무렵 또 대형 벽화가 등장한다. 

 

작은 모나스떼리오 성당이 나왔지만 문이 닫혀있는 것 같아 그냥 지나쳤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이곳에서 순례자들에게 수녀님이 직접 기적의 메달을 걸어주신다고 한다. 

 

이제 오르막길을 오르면서부터 메세타 대평원의 시작이라 한다. 안내책에는 중간을 물먹을 곳이 없으니 물을 충분히 준비하라는 등 주의사항이 쓰여있었다.

 
약간 언덕을 오르는가 싶더니 드넓은 평원이 나타난다. 6년전 언니가 순례길에 올라 며칠을 가도 끝없이 펼쳐지는 이곳 메세타 대평원 어디쯤에서 형부를 보내드렸다 했던 것이 생각나, 형부 한승희 마르띠노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했다. 더불어 그의 가족들, 그리고 내 부모형제, 남편의 부모형제를 위해 기도했다. 모두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슬비는 그치고, 하늘은 각양각색 빠르게 변하고, 바람은 서늘하고, 드넓게 펼쳐진 초원이 인위적으로는 절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변화무쌍한 대자연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하게 한다.

 

한 시간쯤 걸으니 내리막길이 나타나며 멀리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마을이 그림처럼 나타난다.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 마을의 이름이 화덕이라는 단어 오르노(Horon)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카롤루스 대제가 이 마을의 강변에서 화덕을 발견하고 군대가 먹을 빵을 구우라고 명령했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담벼락에 그려진 노란 화살표를 따라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을 걸어 광장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성당과 함께 우리가 묵을 알베르게가 자리하고 있었다.

 

며칠 전 침대가 없어 다음마을까지 더 걸어야 했던 것처럼 오르니요스의 공립알베르게도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중간에 바에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어 10시 45분경 도착했다. 우리 앞에 대기자가 한분밖에 없고, 한국 어르신 멤버 세분이 바로 뒤따라 오셨다. 오픈시간까지는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니 배낭줄을 세워놓고 우선 광장 가까이 있는 바에 들어갔다.

케이크 한 접시와 함께 카페콘레체, 오렌지주스를 주문했다.

 

순례 첫날부터 남편은 매일 내 얼굴을 사진 찍고 있다. 긴 순례여정을 보내면서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사진으로 남긴다고 한다. 오늘은 바에서 사진을 찍으며 갑자기 '당신 얼굴에서 장모님이 보여' 라며 웃는다. 이토록 긴 일정동안 맨얼굴에 최소한의 생필품과 먹거리로 살아보는 것이 처음인지라 사실 나도 궁금했다. 이제 순례 중반으로 접어드는 시점인데도 벌써 초췌한 얼굴에 몸도 비실거리면 앞으로 남은 일정은 어떻게 버텨낼 수 있겠나 싶어 에너지를 허투루 쓰지 않으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다. 

'여보, 나도 가끔 내 얼굴을 보면서 깜짝깜짝 놀라요. 때때로 엄마가, 내 형제자매가 거울 속에서 날 보고 있거든...'

 

바에서 나와 알베르게 오픈시간을 앞두고 성당을 둘러봤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담장 너머로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정오가 되니 알베르게 문이 열리고 침대 배정을 받으며 알베르게에서 준비하는 순례자 식사를 예약했다. 한국인들이 많이 오는지 호스트가 우리말로 음식메뉴를 이야기하여 서로 웃었다.

알베르게는 시설이 많이 협소하였고 침대커버도 따로 구입해야 했다. 전 마을에서 만났던 어르신멤버 세분이 우리 방에 함께 배정되었고, 길에서 간간이 만났던 품이 넓은 하얀 바지를 즐겨 입는 외국인 청년이 나중에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우선 하는 일인 '침대정리하고 씻고 빨래해 널기'가 이제는 말없이 척척 진행이 된다. 알베르게 뒤뜰에 있는 빨랫줄에 세탁한 빨래를 널어놓고 나서 남편과 함께 시장가방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마을곳곳에 작은 소품처럼 꾸며놓은 화분과 꽃들이 오래된 벽들과 어우러져 이곳 사람들의 따뜻한 정서가 묻어나는 것 같다.

 

그새 파란 하늘에 높은 구름이 떠있어 한국의 청명한 가을하늘 같다. 

 

마을에 있는 작은 마켓을 찾아 다음날 먹을 간식과 물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연이와 영상통화를 했다. 이제 막 퇴근하여 저녁밥을 챙겨 먹고 있는 중이란다. 전날 빌바오 다녀온 이야기를 듣고는 대단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래 네 덕분에 꿈을 실행에 옮겨 빌바오까지 다녀왔단다. 고맙다 연이야~~'

 

알베르게 침대에 앉아 다음날 일정을 계획하며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 내일은 알베르게 예약해 놓고 40km 걸어볼까?"

사실 이젠 20km 정도 걷고 멈추는 건 너무 짧다. 오늘도 다음마을까지 가고 싶었으나 혹시라도 알베르게를 잡지 못해 헤맬까 봐 멈췄는데 이젠 하루에 30km쯤은 거뜬히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남편은 잠시 고민하더니 그렇게 하잔다.

어쩌면 내일 먼저 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남편의 동의를 받은 후 지메일로 보아디야 델 까미노의 알베르게에 예약을 요청했더니 예약되었다고 답장이 왔다. 맘 놓고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며 종일 걷자고 했다.

 

성당에 종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가보았더니 곧 미사가 시작된다고 한다. 자칫 미사시간을 놓칠 뻔했는데 다른 분들이 성당 쪽으로 뛰어들어가는 걸 보며 다행스럽게도 미사시간임을 알았다. 성당에는 한국인 단체순례객들로 보이는 분들도 여럿 있었다. 신부님은 순례자미사를 봉헌하며 언어가 다른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배려하듯 직접 미사곡을 부르며 우리를 인도하셨다.

미사 후 순례자들을 앞으로 불러 모아 기도문을 나눠주시며 각 나라의 말로 기도하게 하시고, 성가도 부르게 하셨다. 우린 5월 성모의 달에 맞춰 성가 245번(맑은 하늘 오월은)을 찾아 불렀다. 그리고는 각자 어디서 왔는지 물으시며 어떤 소원 담고 순례길에 올랐는지도 물으셨다. 웃는 모습이 예쁜 여인이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사연을 이야기하니 신부님께서 안수해 주시며 머리에 입맞춤도 해주셨다. 눈물 흘리며 웃는 여인의 모습이 아름답다 생각했다. 

 

신부님은 일일이 모두에게 안수해 주시고 직접 순례도장도 찍어주셨다.

 

뜻밖에 얻은 행운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시간을 보내고 밖으로 나오니 따뜻한 햇살에 웅장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미사 봉헌 후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예정된 저녁식사시간으로 모두 모여 앉았다. 메뉴는 단출했다. 빵과 함께 렌틸콩과 옥수수가 듬뿍 들어간 수프와 야채샐러드 그리고 디저트로 요거트 또는 과일이 준비되었다. 분명 돼지고기도 준비된다고 해서 샐러드 이후 고기가 준비되는 줄 알았는데 바로 디저트가 준비되어 뭔가 음식을 먹다 만 듯한 느낌이었다. 


구석 자리를 차지하여 다행이긴 하나 삐걱거리는 철제 침대에 어르신 멤버 중 어느 한분이 코를 많이 골아 잠들기 힘들다. 벨로라도에서도 같은 방을 썼는데 그땐 어떻게 잤는지 모르겠다. 다음날 긴 여정이 예정되어 있어 귀마개를 최대한 깊이 집어넣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