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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산티아고 순례

[까미노 15.] 각자의 사연을 담고 온 까미노에서 또 다른 우리를 발견하다 | 240519

by 바이올렛yd 2024. 12. 6.

보아디야 델 까미노(Boadilla del camino)에서 까리온 데 로스꼰데스(Carrion de los Condes)까지  25.5km 
5시간  30분 소요 (am 6:20 ~ am 11:50)


2024년 5월 19일 주일

 

라디에이터가 내 침대 바로 옆에 있어 따뜻하게 잠을 잤다. 라디에이터 덕분에 소나기에 젖었던 수건과 속옷이 다 말랐다. 새벽시간에 서늘한 느낌이 들어 발밑에 있던 담요를 잡아당겨 덮고 시간을 확인하니 5시 35분이다. 일어날 시간이다. 전날 무리한 여정으로 지친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개운하다. 

 

숙소예약 없이 이동해야 하기에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알베르게 바에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 후 6시 20분경 길을 나섰다.

 

전날 재치 있는 액션으로 순례자들을 즐겁게 하던 호스트는 새벽부터 일어나 길 떠나는 이들을 위해 바를 지키고 있다.

 

어스름 어둠이 깔려있는 성당 앞 광장을 지나 순례길로 진입했다.

오늘도 조카 진이와 형부 한 마르띠노, 그리고 우리 가족을 위해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밤사이 비가 내려 길은 축축하고 안개가 자욱이 올라오면서 신비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출발한 지 30분 정도 지나 물길을 따라 걷는 오솔길이 나왔다. 까스띠야 운하다.  동녘하늘은 서서히 밝아지고 수로의 물빛반영이 물안개와 어우러져 근사하다. 수년 전에 남편과 함께 선운사로 새벽출사를 나가 물안개 피어오르는 새벽 풍경을 찍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로를 따라 한참을 걷노라니 도로 공사 중인 부분이 있어 공사장을 빙 돌아가야 했다. 

 

선착장을 보며 비로소 운하임을 인정하고 좀 더 걸으니 실제로 배가 띄워져 있다.  

 

까스띠야 운하는 18세기 중반에 공사를 시작해서 19세기 초반에 끝났다고 하는데 운하의 길이가 무려 200km가 넘는다고 한다. 이 운하를 이용해 까스띠야 내륙지방과 깐따브리아 해안 사이의 물류 이동을 하였으며 이후에 관개수로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 운하를 통해 까리온 강과 삐스에르가 강의 물을 띠에라 데 깜뽀스 평원에 고루 분배한다고 한다.

 

프로미스따 입구에 까스띠야운하의 역사를 말해주듯 관개시설 건축물이 나타났는데 대단히 웅장했다.

 

운하를 따라 한 시간 정도 걸어 프로미스따에 도착했다. 현대적인 건물들이 많이 보이는 길을 지나 다음 마을을 향해 쉬지 않고 통과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서로 대화하면서 걷는 모습을 보면 늘 부럽다. 동양인 여자와 서양인 남자가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대화하며 지나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그들을 앞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까미노 마크가 새겨진 오래된 돌기둥 사이를 지나 도로옆으로 길게 뻗은 길을 걸으며 아주 오래전부터 찍혀온 발걸음들 위에 나의 발걸음이 찍히고 있음을 생각하니 지나온 길 위에 내가 나름 자랑스럽다. 

 

출발 두 시간 만에 다다른 곳은 뽀블라시온 데 깜뽀스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그려져 있는 도마뱀벽화가 이색적이다.

 

언덕 위에 대성당이 보이고 마을을 빠져나올 무렵 움푹 들어간 곳에 흙벽돌로 지어진 작은 성당이 있다.

 

쉬지 않고 마을을 통과하여 약 4km를 더 걸어 레벵가 데 깜뽀스에 도착하여 드디어 쉬는 시간이 허용됐다. 날씨도 서늘하고 이제 이력이 붙었는지 중간에 자주 쉬지 않고 걷는 것이 더 편하다.

 

출발한 지 거의 세 시간 만에 갖는 휴식이다.  앞으로 12km 정도를 더 걸어야 하니 거의 반정도 걷고 나서의 휴식이다.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여느 때와 같이 카페콘레체와 오렌지 주스, 그리고 빵 하나를 주문했다.

 

바에서 나와 다시 출발했다. 성당 앞 광장 한편에 서있는 산티아고 순례자 동상 옆에 서서 사진을 찍고 한 바퀴 휙 둘러보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메세타평원답게 완만한 평지에 곧게 뻗은 길을 마냥 걷는다.

 

길게 뻗은 곧은길을 한 시간 넘게 걸으니 아름다운 마을이 보인다. 템플 기사단의 본거지라 알려져 있는 비얄까사르 데 시르가라는 마을이다.

 

마을 오른편으로 보이는 성당은 템플 기사단이 세운 블랑까 성모성당으로 성당에 있는 우물은 템플기사단의 비밀 은신처로 가는 비밀 통로였다고 한다.

 

드넓은 곡창지대 끝없이 펼쳐진 길을 걸으며 남편이 전날 밤에 생각한 바를 이야기한다. 순례 오기 며칠 전 동강 할미꽃 촬영을 갔을 때 절벽에서 떨어질 뻔한 일, 그리고 어제 저녁먹고 나서 알베르게 앞 빗물 젖은 계단에서 미끄러진 일. 다치지 않았음에 감사하며 앞으로 매사에 조심해야겠다고, 경거망동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 생각 때문에 지난밤 잠꼬대를 했었나? 남편의 말을 들으며 나 또한 말과 행동을 경솔하지 않게 해야겠다 생각했다. 우리의 순례길을 망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11시 40분경 까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 도착했다. 전날보다 훨씬 짧은 약 25km의 순례길이 한결 가뿐하게 느껴진다. 

 

수도원에서 운영한다는 산타마리아 알베르게를 찾아가는 길 건너편 골목에서 그라시아 님이 툭 튀어나온다.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왜 여기서 나오시지? 그라시아 님은 다른 알베르게에 투숙을 했다고 하며 우리 보고도 그쪽에 남은 침대 있으니 오라고 한다. 7년 전 연이가, 그리고 6년 전 언니가 다녀간 알베르게에 나도 묵어야지 하는 생각에 저녁 순례자미사 때 만나자 하며 헤어졌다.

어쨌든 어제 40km를 걸은 보람이 있다. 알베르게 앞에서 캐나다 발랄한 아가씨도, 뽀글이 청년도, 요상한 장식을 하고 인사 잘하시던 아저씨도, 타이완 아가씨도, 딸과 함께 온 엄마, 그들과 함께 다니는 아가씨도...  모두 다시 만나 반가웠다.

 

알베르게 어플에 접속해서 미리 개인정보를 입력해야 하는 과정을 모르고 서있는데 타이완에서 온 아가씨가 그의 짝꿍 노랑머리아가씨와 함께 알려준다. 창문에 붙여놓은 큐알코드를 찍어 투숙정보를 적고 대기하다 12시에 체크인을 시작했다. 

 

수녀님들이 환대하며 우리를 안내하신다. 침대배정을 받고 보니 중간자리라 좀 부담스러웠지만 바로 옆자리에 초면인 한국인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춘천에서 오셨다고 했다. 난간 없는 침대에서 자보긴 했지만 이번엔 좌우가 뚫려있어 꼼짝 말고 자야만 한다.  주일인 점을 감안하여 침대 정비하고 나서 우선 밖으로 나가 점심을 먹고 장을 보았다. 마트는 작았지만 순례자들이 필요로 할만한 것들은 충분했다. 며칠 전 세제 없이 세탁기를 돌린 것이 생각나 세탁세제도 소량 구매했다. 그렇지만 알베르게 세탁실에 세제가 구비되어 있어 필요 없었다. 전날 세탁을 못해 밀린 빨래를 세탁과 건조 코스로 모두 처리했다. 세탁기 3유로 건조기 3유로.

 

수도원에서 운영한다는 점 하나로도 너무 편안하다. 마을을 둘러보면서 알베르게 근처에 유명한 빵집에 있다고 한국인모녀에게 소개받아 빵도 조금 샀다. 햇빛 좋은 벤치에 앉아 한국인 모녀와 빵도 조금 나눠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의 지난 이야기를 들으며 놀란다. 그렇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 행복하다 했다.

 

5시 30분이 되자 알베르게 바로 옆에 있는 산타마리아성당에서 수녀님들과 함께 하는 기도시간을 가졌다. 수녀님들의 기도소리는 천상의 소리처럼 아름다웠다.

 

기도시간이 끝나고 다시 알베르게 로비에 모여 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자기소개시간을 가졌다. 까미노에 온 이유를 각자 이야기 나누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함께 행복해하기도 하고 했다. 사연은 각자 다르지만 모두 같은 목적지를 두고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동지다. 마음속으로는 연이와 언니의 이야기를 담아 나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언어소통의 문제로 짧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 아쉬웠다. 각 나라마다 돌아가며 노래 부르는 시간에 우리 한국인 순례자들은 '아리랑'을 불렀다. 

 

저녁식사를 뒤로 미루고 바로 이어진 순례자 미사시간은 아름다운 감동의 시간이었다. 성령 강림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순례자들을 앞으로 나오라 하시더니 제대를 기준으로 빙 둘러서게 하신 후 신부님께서 일일이 돌아가며 축복해 주셨다. 

 

더불어 별도 하나씩 주셨다. 

 

순례길의 마지막까지 힘차게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알베르게에 들어와 늦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드는데 누군가 영상을 틀어놓고 잠이 들었는지 늦게까지 시끄럽다. 결국 10시가 넘어 영상은 꺼졌지만, 대단히 시끄럽게 코를 고는 분이 가까이에 있어 또다시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아침이 되면 힘을 내서 걷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