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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산티아고 순례

[까미노 14.] 무리한 40km 순례.. 'The Camino is a vacation to me!' | 240518

by 바이올렛yd 2024. 11. 20.

오르니요스 델 까미노(Hornillos del camino)에서 보아디야 델 까미노(Boadilla del camino)까지  40.5km 
9시간  40분 소요 (am 6:00 ~ pm 3:40)


 
2024년 5월 18일 토요일
 
40km  도전의 날이다. 더 걷자니 숙소가 있을지 불안하고, 20km만 걷자니 너무 부족한 듯하고, 더구나 시골 작은 마을에서는 일찍 도착해도 할 게 없다. 그래서 전날 남편의 동의를 받고 보아디야 델 카미노의 en el camino 알베르게에 예약을 했다. 힘들면 중간에 멈춰도 되겠지만,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밤새 70대 어르신 세분 멤버 중 한 분이 코를 너무 심하게 고는 바람에 또다시 잠을 제대로 못 잔 채 새벽 6시경 길을 나섰다. 우리의 예상으로는 3시경 도착하지 않을까 싶다. 


이른 새벽 어둑한 길을 걸어 마을을 빠져나와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하는 게 이제 일상이 되었다. 오늘도 진이를 위해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더불어 떠오르는 사람들... 주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다. 나의 가족들, 부모, 형제, 성당사람들, 친구 등등. 고요한 새벽길이 참 좋다. 


구름이 많으나 해가 떠오르며 구름과 함께 만들어내는 그림이 장관이다.

 
언덕을 올라 또다시 대평원이 나타난다.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을 걷다가 언덕 아래에 마을이 나타나 내리막을 내려가면 다음날은 또다시 오르막을 걸어올라 재미없는 평지 걷기를 며칠 반복해야 메세타 대평원이 끝난다 하더니 바로 이런 거였구나 싶다. 

 
아무튼 메세타 평원을 지나며 내내 형부생각도 떠나질 않으니 진이를 위한 기도 끝내놓고 형부를 기억하며 또 묵주기도 20단을 바쳤다. 어쩌면 바람이 되어 우리의 순례길에 함께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시나 우리가 돌아가기 전에 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순간순간 걱정된다.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날 무렵 언덕아래로 향한 길이 나타났다. 길 왼편으로 쑥 들어가 외딴곳에 알베르게가 자리하고 있는 아로요 산 볼 이라는 마을이다. 전날 조금만 더 걸어볼까 하고 살펴보다가 외딴곳에 알베르게가 하나밖에 없어 포기했던 바로 그곳이다. 밤하늘에 별이 너무 예쁘다 하는데 지난밤에는 아마도 별 보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하며 아쉬움을 애써 달랬다.
1352년 나환자를 위한 병원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마을형성이 되지 않은 이유일 것도 같다.

 
산 볼을 지나 또다시 평지다.  드넓은 밀밭에 전날 밤에 비가 내려 길이 질퍽해 걷다 보면 금방 굽 높은 신발이 되어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길 가장자리를 따라 풀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걷기를 약 한 시간 넘게 하다 보니 내리막길이 나오며 온따나스가 눈앞에 펼쳐졌다.

 
새벽에 알베르게 주방에서 간단하게 음식을 먹고 오긴 했지만 마을입구에 있는 바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머뭇거렸더니 남편은 가차 없이 좀 더 가보자 한다.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바로 오른편에 바가 나왔다. 신발에 묻은 흙은 대충 털고 안으로 들어가 초콜릿이 들어간 빵이랑 크루아상, 오렌지 주스, 카페콘레체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알베르게와 함께 운영하고 있어 알베르게에 묵은 순례자들이 식사하는 자리가 따로 안쪽에 마련되어 있었다. 

 
주변에 푸른 초원을 만들어줄 수 있는 샘이 많아 온따나스(Hontanas:샘)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약 30km를 더 가야 하니 갈길이 멀다. 그냥 이 마을에서 출발했다면 딱 알맞을 거리였을 것 같다.  

 
마을 건너편으로 보이는 언덕을 올라가겠구나 생각했는데 실상은 남서쪽으로 난 들꽃이 예쁘게 피어있는 길을 걸었다.  

 
온따나스에서 까스뜨로헤리스를 향하는 길 옆으로 건축물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산 비센떼 성당 유적이라 한다.

 
길게 이어진 들길 따라 한 시간정도 걸었을까? 드디어 쉬어갈 수 있는 장소가 나왔다. 산 안똔 수도회의 병원과 수도원이 있던 곳이라 하는데 폐허로 남아있었다. 13~14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그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약간의 기부금을 내고 쎄요를 찍었다. 

 
잠시 자리에 앉아 쉬는 중 부르고스 공립알베르게에서 만났던 한국아가씨를 뜻밖에 만나 굉장히 반가웠다. 우리 빌바오 가던 날에 부르고스를 출발했을 텐데 왜 지금 여기에 있느냐 물었더니 하루에 10km 정도로 아주 조금씩 걷고 있다고 한다. 지난밤에는 온따나스를 바로 앞두고 오른편에 있던 전망 좋은 알베르게에서 쉬었는데 석양이 너무 예뻤다며 이야기했다. 맞다. 전날 오르니요스에서도 저녁하늘이 참 예뻤었다. 


천천히 걷겠다는 귀여운 아가씨와 인사를 하고 우리는 또다시 길을 재촉했다. 
 
수로 공사 중인 들판을 지나 약 30분 정도 더 걸어 까스뜨로 헤리스에 도착했다. 좀 전에 만난 한국아가씨는 이 마을에서 묵을 예정이란다. 산 꼭대기에 있는 규모가 커 보이는 성 아래 고풍스러운 마을이 멋스럽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둘둘 말아진 매트가 떨어져 있어 잠시 고민하다 혹시라도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되돌아오고 있을지 몰라 집어 들고 마을로 들어갔다. 아마도 자전거 순례하는 사람이 떨어뜨린 것 같은데 주인을 찾아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매트는 결국 마을 입구에 있는 잘 보일만한 곳에 놓아두고 왔다.

 
마을 초입에 있는 산따 마리아 델 만사노 성당 문이 열려있어 들어갔다. 작은 박물관 같은 느낌으로 여러 가지 전시물들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진정한 까미노 순례의 마음을 담아 기도초에 동전을 넣으니 불이 몇 개 켜졌다.  

 
스페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담벼락의 포도넝쿨은 주인장의 손길이 배어있어 볼 때마다 신기하고 멋지다. 마을을 지나오며 한국어로 쓰여있는 안내판을 보고 반가웠는데, 바로 이곳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 오리온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진작 알았다면 들어가서 비빔밥을 사 먹었을 것 같다. 

 
까스트로 헤리스 마을은 길을 따라 꽤 길게 이어져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올 무렵 벤치에 앉아 바나나를 꺼내 먹었다. 자주 물을 마셔야 한다고 하지만 기온이 서늘하고 구름도 있어 그다지 목이 마르지는 않다.

 
마을을 빠져나오니 양귀비 꽃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 멀리 보이는 산에 오르막길이 보인다. 설마 저 길을 올라가는 건 아니겠지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길이 눈앞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듯했다. 평원지대라 마냥 지루하게 긴 평지만을 걸을 거라 맘대로 생각한 내 잘못이다.

 
그나마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힘을 내보지만 오르막길을 길고 가팔라서 꽤 힘들었다. 남편도 힘든지 헐떡이며 천천히 올라간다. 올라갈수록 뒤돌아보면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다. 

 
멀리 우리가 지나온 길이 보이고 그 뒤로 까스트로 헤리스가 보인다.
 
보통 이런 장관을 접할 때엔 분명 정상에 편의시설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기대를 하게 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햇빛을 피해 앉아서 쉴 수 있는 건물하나 달랑 있었다. 그 용도에 맞게 우리도 잠시 벤치에 앉아서 사과를 꺼내어 먹었다. 

 
잠시동안 이어진 평원을 걷는 중 빗방울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16km는 더 가야 하니 제발 참아주기를 기도했다. 다시 내리막길이 이어지면서 넓게 펼쳐진 평원이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펼쳐져있다. 참 넓기도 하다.

 
까스트로헤리츠를 지나온 지 두 시간이 훌쩍 넘어 오후 1시를 향해 가고 있으나 주변에 보이는 건 푸른 들판뿐이다. 
 
개 두 마리를 데리고 걷는 분들을 보며 피레네를 넘을 때 보았던 개들이 생각났다. 중간에 갈림길에서 우리와 다른 길로 가기에 아닌가 보다 생각했는데 길을 잘못 들었었는지 다시 되돌아와 우리 뒤에 멀찍이 따라오고 있었다.
 
외딴곳에 덩그러니 있는 건물 앞에 쉬어갈 수 있는 의자를 나란히 마련해 두어 눈길을 끌었다. 알베르게를 운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센스가 묻어나는 나무간판이 서 있다. 산 니꼴라스 호스피탈이라 쓰여있다.

 
문이 닫혀있는 것 같아 그냥 지나쳐 물가의 벤치에 앉아 가방에 든 빵을 꺼내어 요기를 했다.  빵이라도 있었으니 다행이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드문드문 순례자들이 지나면서 인사를 한다. 우리가 일어서자 우리가 앉았던 자리에 다른 이들이 자리를 잡고 앉는 걸 보며 우린 다시 출발했다. 
 
유서 깊은 이떼로 다리를 건너자 커다란 안내판서 서있다. 
알폰소 6세가 얀따다 전투에서 그의 형제 산초 2세를 이긴 후 까스띠야와 레온왕국의 결합을 기리며 건설된 다리라고 하는데, 중세 연금술사들은 이 다리를 가톨릭사상에 위배되는 비전을 받은 자신이 죽고 새로 태어나는 곳이라 믿었다고도 한다. 물론 우린 그런 의미를 모르고 지나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얼마 걷지 않아 마을이 나왔다. 


이테로 데 라 베라 마을은 작고 아담했다. 스페인 마을을 지나면서 우리 농촌 생활과 비슷한 부분을 발견했는데, 이곳을 지나면서도 우리네의 시골집 같은 인상을 받았다. 마을 초입에 알베르게와 함께 하는 바를 만났으나 북적이는 사람들로 그냥 지나쳤다. 우리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감지할 무렵 다행스럽게 바가 나타났다. 앞서가던 남녀 순례객이 들어갔고 우리도 따라 들어갔다. 남편은 밥순이가 점심을 못 먹게 될까 봐 많이 걱정했다고 말한다. 마을 초입의 바를 그냥 지나치자 했던 남편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을 들켰나 보다. 난 달걀과 감자가 들어간 꾸덕한 덩어리 음식 또르띠아, 그리고 오렌지 주스, 남편은 빵과 맥주 한잔을 주문했다. 

 
이제 8km 남았다. 
시간은 오후 2시를 향해 가고 있고, 까미노에는 우리만 달랑 남은 느낌이다.


언덕을 넘으니 드디어 우리의 목적지 보아디야 가 멀찍이 보인다. 


오후 3시 40분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호스트가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 리!'하고 내 이름을 부른다. 어떻게 보자마자 난 줄 알았을까 싶지만 예약한 한국인을 찾기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녔을 거다. 이미 도착한 이들은 벌써 씻고 빨래를 널어놓고 각자 조용히 쉬고 있었다. 늦게 도착했지만 5인실 조용한 방에 배정을 받았다. 독일에서 왔다는 여인이 먼저 들어와 쉬고 있었고 2층침대 두 개는 비어있어 1층에 나란히 침대를 차지했다. 이후 남자분 한분이 남편침대 2층으로 자리를 잡아 4명이 한방을 쓰게 되었다.
 
남편이 씻으러 간 사이 독일인 여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오늘 40km를 걸어 많이 피곤하다 하며 웃었더니 깜짝 놀란다. "The Camino is a vacation to me!"라며 자신은 지금 순례길에 와있지만 휴가를 즐기고 있다고 한다. 그래, 우리가 무리하기는 했지.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는 소리에 자기도 '장미'라는 이름을 가진 한국인 친구가 있다며 우리를 반가워했다. 한국어로 장미는 'rose'라고 알려줬다.  
 
씻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 마을을 둘러보러 나갔다. 보아디야 델 까미노는 정말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보아디야 성모승천성당 앞의 심판의 기둥

 
정말 편의시설은 아무것도 없었고 달랑 우리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바가 전부였다. 저녁식사는 알베르게에서 마련하는 순례자 식사로 하기로 했고, 마트가 없어 간식을 사지 못해 다음날 걸으면서 무조건 첫 번째 바에 들어가기로 했다.

 
저녁 7시 무렵이 되자 로비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예약을 안 한 상태라 혹시라도 저녁을 먹지 못하는 불상사가 있을까 봐 미리 가서 기다렸다. 한국인 젊은이들이 보여 물어봤더니 정해진 저녁시간에 바에 들어가면 식사를 할 수 있다는 말을 호스트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식당을 가득 채운 순례자들을 호스트는 위트 있는 안내로 즐겁게 식사를 하게 했다. 첫 번째 코스로 야채수프와 렌틸콩수프가 나와 선호하든대로 각자 떠먹게 하고, 두 번째 본메뉴에 생선, 소고기스튜, 닭고기 중 선택하게 되어있어 우린 소고기스튜와 닭고기를 선택했다. 야채가 곁들여져 나와 론세스바예스에서 고기만 달랑 나왔던 것과 비교되었다. 와인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아이스크림이 나왔는데 자주 먹던 아이스크림 종류다. 다크초코가 덮여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티코'.


우리와 함께 나란히 자리했던 세 부부는 부산에서 왔다고 했다. 그들도 우리가 오늘 벌인 무리한 순례 이야기를 들으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건너편 테이블에 이태리할머니도 식사를 하고 계신다. 무리한 여정이었지만 덕분에 다시 볼 수 있는 이들이 생겨 반가웠다. 저녁식사는 노련한 호스트의 서비스로 순조롭게 잘 이루어졌고 음식도 참 맛있었다.
 
저녁 먹고 있는 사이 소나기가 주룩주룩 쏟아졌다. 숙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데, 우산이 없어 잠시 대기했다가 비가 잦아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계단이 미끄러웠는지 남편이 미끄러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찔한 순간이었는데, 다행히도 많이 다치지는 않은 듯했다. 

마당에 수건을 널어놓았더니 소나기로 흠뻑 젖어버려 다시 빨아 방에 널었다. 방은 조용하고 포근하다. 나보다 먼저 잠든 남편은 잠꼬대를 한다. 내일 아침 아무 문제없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길고 긴 하루였다. 부엔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