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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산티아고 순례

[까미노 16.] 아름다운 사연은 바람을 타고 추억처럼 밀려 든다 | 240520

by 바이올렛yd 2024. 12. 14.

까리온 데 로스꼰데스(Carrion de los Condes)에서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쁠라리오스(Terradilllos de los Templarlos)까지  27km 
5시간 45분 소요 (am 6:00 ~ am 11:45)


2024년 5월 20일 월요일
 
이제는 시끄러워도 잘 잘 수 있어야 하는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지 잠들기 힘들다. 썰렁한 듯하여 일찌감치 침낭 위에 담요를 한 겹 더 덮고 잠을 청했으나 밤새 뒤척였다. 새벽이 되니 누군가 계속 드나드느라 문 덜컹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린다. 시계를 보니 아직 5시가 안 되었다. 난간 없는 2층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 새벽에야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이 깨어버려 일단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침낭을 접고 배낭을 챙겨 로비로 나와 짐정리를 하고 간단하게 씻고  빵과 우유로 이른 아침식사를 했다. 이곳도 6시에 오픈이라서 떠날 채비를 하고 잠시 대기해야 했다.
 
전날 그라시아 님으로부터 오늘 목적지 마을 알베르게에 예약했다는 말을 듣고 불안했었는데, 전날 연락해 본 결과 일부만 예약받고 나머지는 선착순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래도 가능성은 있으니 안심이다. 빨리 걸어가면 되지.
 
6시 출발. 구름 틈 사이로 서광이 밝아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서늘한 새벽이다. 부르고스 이후 줄곧 차가운 기온에 구름 낀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진이와 형부를 위해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메세타평원 어딘가에서 작별을 했다는 말을 듣고 줄곧 어디쯤일까 생각을 했는데 까리온 지나서 보내드렸다고 하는 걸 보니 바로 오늘 걷는 길이다. 

 
마을을 빠져나올 무렵 건너편 길에서 혼자 걸어오고 있는 제주에서 온 분을 만났다. 부르고스 이후 처음 만나는 트래킹멤버 중 한 분이다. 그녀는 여전히 일행들보다 앞서 걷고 있었다. 묵주기도를 잠시 멈추고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책하듯 함께 걷다가 자연스럽게 뒤로 처졌다. 어쩌면 계속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녀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는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출발한 지 한 시간 40분 만에 쉴 수 있는 장소가 나왔다. 그야말로 간이 휴게소. 컨테이너 바 앞에 누군가 손짓하며 우리를 반긴다. 그라시아 님이다. 그라시아 님이 묵었던 알베르게 오픈이 자유로웠는지 우리보다 약 30분 정도 일찍 출발하셨다고 한다. 함께 앉아 간단히 요기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간간이 만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편한 사람들이 하나 둘 생기니 덜 힘든거겠지.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다시 출발했지만 알베르게를 예약한 그라시아 님은 자연스럽게 뒤로 처지고 그렇지 않은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많은 사람들이 마라톤이라도 하는 듯이 같은 방향으로 부지런히 걸어간다. 

 
이쯤일까?
벌써 여러 해가 지났지만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눈물 나게 아름다운 형부와 언니의 사연을 안고 메세타평원을 걷고 있다. 투병 중 산티아고 순례를 꿈꾸다가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형부는 산티아고 순례길 메세타 평원에 자신을 뿌려달라고 유언을 남겼었다. 풀지 않으면 안 되는 숙제처럼 주어진 산티아고 순례를, 언니는 남편이 자신에게 준 선물처럼 생각하고, 이듬해 봄 딸과 함께 순례길을 떠났었다.  

 
까리온을 떠나 곧은 평지길을 17km 정도 계속 걸어가야 마을이 나오니 물과 간식을 잘 준비해야 한다 했는데 역시 목을 축일만한 곳도 화장실도 없었다. 
출발한 지 세 시간 반쯤 걸어 드디어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깔사디야 데 라 꾸에사라는 마을이다.

 
바가 하나 있었지만 그냥 통과했다. 도로변을 따라 난 순례길을 따라 걷는 사이 구름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하더니 간간이 햇빛이 나기 시작한다.  

 
언덕아래로 난 길을 따라 돌아 나오니 멀리 마을이 보인다. 전날 춘천에서 온 분이 머물 예정이라 하던 레디고스라는 마을이다. 

 
들판 한가운데 원형으로 된 전통 건축물이 있는데 일명 비둘기집이라고 한다. 실제 비둘기를 길러서 새끼 비둘기를 팔고, 비둘기 분뇨를 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건축했다고 한다.

 
우린 약 3.5km 더 걸어 떼라리요스까지 갈 예정이다. 

 
떼라리요스 가는 길에 가족들에게 풍경사진을 찍어 보내며 근황을 알렸다. 걷는 동안 구름이 해를 가려주고 신기하게도 도착할 즈음 구름이 걷히는 날들이 며칠채 반복되고 있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과 하늘의 구름과 빛과 그늘이 만들어주는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 서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을 이리저리 둘러봐도 보이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다. 

 
주변풍경에 빠져 뒤처졌다가 홀로 마을에 들어서면서 길을 잃었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오른편길로 가야 하는 것을 직진하여 걷다 보니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이 나온다. 마을주민으로 보이는 남자분께 알베르게를 물으니 길을 알려주신다. 남편이 다시 찾으러 내려오면서 어디 갔다 이제 오냐고 뭐라 한다. 오전 11시 45분 도착. 어쨌든 알베르게 오픈시간 전에 도착하여 무난하게 알베르게 체크인 할 수 있었다. 
우리보다 일찍 도착한 분들이 서너 분 있었고, 곧 서울 모녀와 친구, 트래킹 멤버 4명, 그라시아 님, 캐나다아가씨와 그 친구들이 모두 들어왔다. 서울 모녀는 일정에 여유가 없어 내일 레온으로 점프한단다. 6월 초 입국이라고 했다. 그리고 코골이 선수 4인방 남자들... 인사 잘하는 외국인 남자. 브라질에서 온 다리 아픈 여인. 알록달록 머리를 한 캐나다 여자. 그리고 오늘 새로 만난 한국여자 등등... 모두 길에서 만난 익숙한 이들이다.

 
12시가 되자 순서에 따라 침대를 배정해 줬다. 우린 8인실 2층침대 배정을 받아 들어갔는데 우리 뒤로 알록달록 캐나다 여자가 들어왔다. 지난밤 까리온 알베르게에서 벌레에 물렸는지 손 등과 발목 여러 군데 모기 물린 것 같이 가려워 샤워 후 입었던 옷을 모두 손빨래했다. 흐렸던 하늘이 맑아져 양지바른 데에 빨래를 널어놓고, 그라시아 님과 함께 알베르게에 있는 바에 들어가 점심식사를 했다. 그라시아 님과 또 헤어질지 몰라 서로 전화번호를 나누었다.  
 
식사 후 마을을 둘러보기 위해 밖으로 나가 언덕길을 오르니 성당이 나온다. 혹시 순례자미사가 있지 않을까 살펴봤지만 문은 닫혀있고 정보도 없어 둘러보고만 내려왔다.
떼라리요스 데 로스 뗌쁠라리오는 12세기 템플기사단의 영지였으나 지금은 기사단과 관련된 것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저녁식사를 딱히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알베르게 바에 들어가 그라시아 님과 함께 앉아 먹었다. 시골 작은 마을에 묵게 되는 날은 비교적 여유시간이 많아 때론 좋기도 하다.

 
무릎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다음날부터 배낭을 메고 걸어볼까 얘기했더니 남편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다. 괜찮을 것 같다며 다시 얘기했더니 그럼 그렇게 해보자 한다. 그동안 동키 보내던 내 배낭에 몰아넣었던 짐을 정리하며 불필요한 것들은 종이 한 장이라도 더 비워보자 구석구석 살펴보는 중 배낭 앞 지퍼를 내리고 물건을 꺼내다 보니 접힌 종이가 깊숙이 들어있다. 펼쳐보니 mola 호스텔 안내문이 적혀있는 종이로 그 속에 5유로 지폐가 함께 들어있었다. 안내문에 펜으로 '배낭 속에 넣어달라' 적었었는데, 그대로 해 줬던 거다. 고마움을 어떻게 전달할까 생각하다가 부킹닷컴 예약 후기에 감사함을 표현했다. 아마 집에 돌아와서야 알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그래도 일찍 알게 되어 다행이다. 덕분에 순례 중 만나는 스페인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조금은 더 깊어지지 않았을까? 
 
오후 늦게 딸과 함께 온 부부가 우리 방에 들어왔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 집 남편이 코를 골았다. 코골이에서 해방되기는 쉽지 않다. 귀마개를 깊숙이 집어넣고 잠을 청하지만 전날밤에 벌레 물린 자리가 몹시 가렵다. 남들은 모기 물린 것 같다 하는데, 내 생각엔 추워서 침낭 위에 덧덮었던 담요가 께름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