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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산티아고 순례

[까미노 27.] 선택의 기로에서 의미를 찾다. 우연이 아닌 필연? | 240531

by 바이올렛yd 2025. 2. 28.

뜨리야까스떼야(Triacastela)에서 사리아(Sarria)까지  24.5km 
8시간 40분 소요 (am 6:40 ~ pm 3:20) 수도원관람(1시간) 포함


2024년 5월 31일 금요일

 

새벽에 남편이 밖에 나갔다 오늘가 싶더니 아침에 일어나 별이 너무 예쁘게 떠있었노라 얘기한다. 이태리 아가씨랑 셋이서 자니 조용한 가운데 잘 잔 듯싶으나 간혹 침대가 들썩여 깨기도 했다. 5시 50분쯤 일어나 화장실 다녀오고 나니 남편도 이태리 아가씨도 일어나 주섬주섬 준비하고 있다. 불을 켜도 될까 말했더니 이태리 아가씨가 벌떡 일어나 불을 킨다. 깔끔하고 당찬 아가씨다. 볼로냐에서 왔다고 했었는데, 길에서 자주 만나 익숙하기도 하지만 같은 알베르게를 몇 번 함께 이용하면서 친숙해지기도 했다. 프랑스 부부도, 이태리 부부도 마찬가지다. 론세스바예스에서 함께 앉아 식사했던 폴란드 부부는 나헤라 이후로 못 보아 잘 걷고 있는지 궁금하다.

 

배낭을 챙기고 침대정리한 후 테라스에 앉아 간단히 요플레 하나씩 먹었다. 담벼락에 쓰인 메시지들을 보며 우리도 간단히 메모를 남겼다. '부엔까미노! 연두 봉려리' 

 

새벽시간 약 40분의 차이가 이 정도로 다른 세상이라니... 거의 어둑한 가운데 길을 나서다가 천천히 여유를 두고 출발하니 밖은 온통 제 본연의 색을 띠고 있다.  하늘에 아직 못 넘어간 반달이 떠있고 동쪽하늘은 금방이라도 빛이 쨍하고 내리쬘 듯 밝아있다.

 

전날 뿌듯한 점심식사를 했던 빠를 지나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양갈래길 표지석 앞에 섰다. 예정대로 우린 연이가 걷지 않은 왼쪽길 사모스루트로 가기로 했다. 산실루트보다는 7km가 더 길어서 사리아까지 약 25km라 한다.

 

아스팔트 도로변을 따라 걷다가 도로와 약간 떨어져 있는 숲길을 따라 걸었다. 


세찬 물소리를 내뿜고 있는 오리비오 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고 거의 한 시간 정도 도로를 따라 나 있는 길을 걷다가 작은 마을 산 크리스또보 더 레알을 지나 오른쪽 숲길로 들어섰다.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햇빛을 받아 빛나는 숲, 싱그러운 바람결이 우리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예쁜 숲길을 따라 걸어 8시경 렌체에 도착했다. 마을 언덕에 올라서니 아침햇살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보며 동화 속 키다리아저씨가 생각났다.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며 끝까지 안전하게 지켜줄 것 같은 느낌이다.

 

남편이 갑자기 대구아줌마가 보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요 며칠 잊고 있었던 바라 바로 못 알아들었다. 그럴 리가 없지. 우리 뒤에 오고 계실 텐데 우리 앞에서 보인다는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굽이진 길을 돌아서니 진짜로 보인다. 젊은 아가씨와 둘이서 걷고 있었다. 지루할 수도 있던 순례길에 즐거운 에피소드가 생기는 찰나였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부르니 뒤돌아보며 반가워 펄쩍펄쩍 뛰었다. 그걸 바라보던 외국인 부부가 더 즐거워하며 우리의 모습을 사진 찍어도 되냐 묻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느낌으로 당연 '오케이~~' 했다. 

 

어쩜 우리가 모두 더 먼길인 사모스루트를 선택했던 것은 다시 만날 운명으로 내려진 결정이지 않았나? 서로 이야기를 짜 맞춰가며 지난 3일 동안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하느라 잠시 정신이 없었다.

 

산 마리뇨 도 레알의 성당 옆길을 지나 농로를 따라 걷다 보니 터널이 나오고 걷기 좋은 오솔길은 계속 이어진다.

 

출발한 지 2시간 20분쯤 지날 무렵 검은 지붕 건물들이 웅장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사모스 수도원이다.

 

오르락내리락 작은 마을들을 지나온 길은 지루하지 않고 재밌는 예쁜 길이었다. 사모스길이 예쁘다고 하더니 정말 예쁘다. 다리를 건너며 수도원의 외관만 바라보고, 우선 근처에 있는 빠를 찾아 들어가기로 했다. 

 

다리에 서서 수도원 전경을 구경하다 비야프랑카에서 같은 알베르게에 묵으며 순례자식사를 함께 했던 이태리 부부를 만났다. 다리가 많이 아프다고 했었는데 그런대로 좋아 보였다. 반가워 인사하고 그분들 사진도 찍어주고, 아내 되는 분이 우리 부부 사진도 찍어줬다. 언제 또 만날 수 있겠지.

 

길옆에 있는 빠에 들어가 빵과 우유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했다. 

 

우리가 먼저 식사를 하고 있는데 잠시 후 그라시아 님과 한국 아가씨가 함께 들어왔다. 그라시아 님은 이제부터의 일정은 당신이 직접 정할 거라 헤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 말한다. 귀국할 때까지 다시는 못 만나겠구나 생각했지만, 그래도 혹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전날 오 세브로레이를 넘어 뜨레야카스테야까지 내려와 산길을 30km 넘게 걸었다고 했다. 늦은 시각에 내려와 알베르게에 침대가 없어 한국아가씨 둘이서 잡은 2인실 바닥에 매트리스 놓고 함께 자는 해프닝이 벌어졌다며 한국아가씨들에게 미안하고도 고맙다 한다.

 

사모스 수도원으로 향했다. 10시에 내부관람 프로그램이 있어 수도원 문 앞에 여러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내부관람을 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표를 끊고 잠시 기다렸다.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산 훌리안과 산따 바실리사 왕립 수도원은 16,18세기에 건축되었다고 하는데 중정에 있는 네레이다스의 분수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괴물모습의 거대한 가슴을 가진 여성 조각상이 분수를 받치고 있는 형상인데, 한 신심 깊은 베네딕토회 신부가 이 조각상이 수사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 하여 분수를 수도원 밖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한다.  분수를 해체해 옮기는 과정에서 놀라울 만큼 무거워져 결국 옮기지 못하고 아직까지 그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한다.

 

회랑을 지나 또 다른 건물로 들어서니 베네딕토 성인의 일생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도슨트의 설명을 들고는 있으나 도통 알아들을 수 없으니 추측으로만 대략 이해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마지막은 성전으로 안내를 했다. 

 

딱히 뭐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중정에는 이 수도원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페이호 신부의 동상이 서 있는데, 그는 스페인 계몽주의의 가장 유명한 석학으로 알려져 있으며 말년을 이 수도원에서 보냈다고 한다.

 

사모스 수도원 내부관람을 마치고 11시에 다시 출발. 약 1시간 반을 사모스에서 보내고 다시 출발하여 좀 늦은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 같다. 도슨트가 함께 했지만 스페인어 해설이라 알아들을 수도 없어 시간이 아까운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내부관람에 대한 미련은 없을 것이니 잘했다 생각했다.   

 

여전히 길은 예쁘지만 오르락내리락 힘들다. 오늘은 유난히 한국 순례자들이 많이 보인다. 짧은 순례를 계획하는 사람들이 보통 시작하는 지점이 뜨리야카스테야나 사리아라고 하더니 아마도 100km 순례를 목적으로 하는 순례자들이 아닌가 싶다. 

 

동굴 같은 숲을 빠져나와 언덕에 올라서니 성당의 종소리가 들린다. 종탑에 올라가 직접 종을 치고 있었다. 성당입구 테이블 위에 기부금 모금함과 함께 순례 도장을 찍을 수 있게 마련해 놓았다. 

 

사모스를 출발한 지 거의 두 시간 동안 숲길과 도로길을 오르락내리락 걸어 큰길에 들어서니 비로소 멀리 사리아가 보였다. 산실루트랑 어디쯤에서 만날까 두리번거리며 우리가 지나온 길이 생각보다 고난도였음을 실감했다.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빠에 그라시아 님과 한국아가씨가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수도원에 있는 동안 먼저 출발해 도시를 목전에 두고 쉬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시를 바라보며 걷다 보니 두시 반이 넘어가고 있다. 결국 수많은 계단을 숨 가쁘게 오른 후 눈에 보이는 빠에 무작정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중 한국인 남녀가 들어왔다. 산티아고 순례를 시작하기 위해 사리아에 막 도착한 수원에서 온 아빠와 딸이라고 했다. 끄레덴샬을 구입하여 첫 도장을 찍으며 우리 보고 어디서부터 걸었냐 묻는다. 생장에서 출발하여 지금 27일째 걷고 있다 하니 대단하다 하시며 놀란다. 딸은 가방에서 젤리를 꺼내주며 부엔까미노를 외치고 우리도 길에서 만나자며 부엔까미노를 외쳐줬다. 그들은 지루한 순례길에 큰 즐거움이었다.

 

음식은 맛있었고, 맥주는 시원했다. 허기와 갈증을 해소하고 나서 다시 길을 떠났다. 다 왔다 생각했는데 우리의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다. 길옆에 있는 빠에 이태리 아가씨가 먼저 도착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반가워 인사하며 우리는 막달레나 수도원 알베르게로 간다 하니 또 다른 남자분이 길을 가르쳐준다. 

 

남편은 앞서 걷고, 난 그 남자가 길을 안내해 주는 줄 알고 따라가다가 사리아를 벗어날 뻔했다. 남편에게 다급히 카톡전화를 했더니 왜 안 오냐고 한다. 내리막길을 다시 올라가 왼쪽으로 돌아가니 학교 앞에 픽업하러 온 차량들이 늘어서 있고 그 옆으로 성당과 수도원이 있었다.

 

알베르게에 들어서니 남편이 체크인을 하다 말고 날 기다리고 있다. 여권과 크레덴샬을 꺼내어 주며 호스트의 안내를 듣고 침실로 향했다. 늦은 시간에 도착했는데도 빈침대가 많다. 대략 열다섯 명 정도 들어온 듯하다. 

 

씻고 빨래해 널고 시내로 나갔다. 사리아의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어 전망은 좋으나 마트까지 가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렸다.

 

마트에 다녀오면서 거리구경하고 돌아와 알베르게 주방에서 저녁식사로 파스타를 준비하고 있는 중 한국인 아가씨가 들어왔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함께 앉아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가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며 그라시아 님을 아냐고 물었다. 그녀는 산티아고 북쪽 루트를 걷다가 레온에서부터 프랑스길을 걷고 있으며, 3일 전에 그라시아 님을 같은 알베르게에서 만났고, 이후 계속 같은 마을에서 묵고 있다고 했다. 물론 다음날 새벽에도 함께 출발하기로 했다고 한다. 

 

같은 시간 주방에서 저녁식사 준비를 하던 프랑스 남자가 남편에게 뭐라 이야기를 하며 남편의 등을 가리킨다. 티셔츠에 쓰여있는 안시(Annecy)가 자기 고향이라며 아주 아름다운 곳이라 말한다. 남편은 이것도 대단한 인연이라 하며 다음에 꼭 그곳에 여행을 다녀오고 싶은 마음이 생겼단다. 주방에서 한국아가씨랑 프랑스 남자와 오붓하게 식사하며 이어진 이야기가 오늘 하루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주는 역할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