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잠이 안오더니 결국엔 잠이 들었었나보다. 이른 새벽 눈을 뜨니 4시반쯤 되었다.
평소 일어나는 시각 즈음에 눈이 떠진 것이다.
딸에게 연락했더니 벌써 씻고 출근준비 하고 있다.
너무 이른 새벽시간이라 어두워서 걸어가기엔 무서우니 집앞에서 버스타고 전철역에 갈 예정이라 한다.
좀 더 누워있다가 밖이 서서히 밝아오는 듯하여 5시반경 기상, 남편과 함께 호텔밖으로 나갔다.
강변에 삼삼오오 모여 음악을 틀어놓고 체조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운남성에서 보았던 장면이다.
이것도 중국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로 도로엔 오토바이들이 즐비하다.
전날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이동하면서 본 장면이 도로에 자동차보다 오토바이가 많다는 것.
가이드님이 말씀하신 것만큼 위험해보이지는 않는다. 방심하다 소매치기 당할 수도~~^^
우리나라와 2시간 시차설정이 되어 있어 아침 해뜨는 시간이 우리보다 좀 빠르다.
6시경 한강 건너 건물사이로 해가 떠오른다.
한강이라는 이름은 서울이나 다낭이나 넓은 강이라는 의미로 한강이라 불리지 않았을지..
어느정도 한자를 사용하는 민족들의 특성인 듯 하다.
산책 후 들어오면서 6시반경 호텔조식으로 아침식사
딸이 베트남 여행 후 '베트남은 먹을 것 천국'이라 하더니 호텔조식 메뉴 또한 좋았다.
오늘 일정은 호이안으로 이동, 투어를 마친 후 다시 다낭으로 돌아올 예정이라 간편하게 외출준비를 하고 호텔을 나섰다.
8시반 호텔 출발. 약 15분쯤 이동하니 미케비치 해변 가까이에 바다의 별 성모님 성상이 있다.
원래 바다의 별 성모님은 Soeur 수도원 안에 있었는데, 다낭 해변도로의 확장으로 Soeur 수도원이 해변으로부터 더 안쪽으로 이동하였지만, 성모님상은 함부로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바다의 별 성모님상 2006년 제15호 태풍 상산이 필리핀과 베트남등지에서 약300여명의 인명피해를 냈을때, Soeur 수도원 또한 바다에 인접해 있어 많은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성모님상 주변의 많은 소나무들도 거의 쓰러졌고, 해변에 있는 주택의 약80% 이상 피해를 볼 정도로 강한 태풍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성모님상과 성모님상 위의 허름한 양철지붕은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바다의 별 성모님상을 찾아 기도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고, 다낭시의 인민위원회는 Soeur 수도원 수녀님들과 의논하여 현재 자리에 5000㎡의 땅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바다의 별 성모님을 모시는 공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
성모님상 앞에 기도하는 마음을 담아 향을 꽂아두고 한바퀴 돌아본 후 다시 버스에 올라탔다.
이곳 베트남은 불상앞에 향을 꽂는 것처럼 초가 아니라 향을 피운다고 한다. 연기가 하늘로 피어올라가면서 우리의 소원하는 바가 하느님께 전달될 거라는 믿음때문인가?
오늘일정의 주목적지 짜끼우 성당으로 이동
짜끼우 성모발현지 베트남 교회 성모 발현지는 모두 5곳이며 베트남 교회가 정한 공식 성모발현지는 라방과 짜끼우 두 곳이다. 1883년 투덕 왕이 죽고 젊은 함느왕이 왕위를 이어받자 프랑스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왕권 지지운동과 베트남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왕궁의 관리들이 주축이 된 이 운동은 1888년 함느 왕이 프랑스 군에 체포되어 알제리로 추방되면서 끝을 맺었다. 왕권 회복 운동에 가담했던 많은 지식인들이 서구 세력과 서구 종교에 대한 저항 운동을 부추기면서 2885년부터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났다. 1885년 9월9일 반탄의 군인들이 베트남 중부 항구도시 다낭에서 서남쪽으로 40여㎞ 떨어진 주민 900여명의 작은 마을 짜끼우를 포위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저행했고 당시 짜끼우 성당 주임신부였던 브뤼에 신부는 성당에 모인 노인, 아이들, 여성들과 함께 탁자 위에 성모상과 촛불을 켜놓고 성모님께 이 곤경을 해결해 주시도록 함께 기도하였다. 성당을 둘러싸고 포격을 하던 군인들은 성당 지붕에 하얀 옷을 입고 서 있는 여인을 목격하였다. 이 여인은 이틀 동안 같은 곳에 서 있었고 군사들의 포격은 빗나가기만 하였다. 포격에 실패한 군인들은 코끼리 부대를 동원해 성당을 공격했고 성당 꼭대기에 흰 옷을 입은 여인과 그 주변에 빨간색과 하얀색의 옷을 입은 천여명의 아이들이 나무에서 내려와 코끼리 부대를 향해 행진해왔다. 이 광경에 놀란 군인들은 혼비백산하면서 공격이 중단되었다. 9월9일부터 사흘간 나타나 군인들로부터 신자들을 지켜 준 여인을 정작 성당 안에 있던 신자들은 보지 못했고 바깥에서 이를 지켜 본 주민들이 군사들이 물러난 후에 신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이 기적은 당시 프랑스인 브뤼에 주임 신부가 프랑스 교회에 보고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짜끼우 본당은 현재 성모성월인 5월과 성모 마리아가 발현하신 9월 두차례에 걸쳐 이 놀라운 일을 기념하고 있다. 1898년 '믿는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께 성당이 봉헌되었다. 오늘날 짜끼우 성당은 성모 발현 당시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당시에는 단층 삼각 지붕의 성당이었지만 신자들의 수가 늘어나자 정면 양쪽에 기둥 두 개만 남겨둔 채 2층 성당으로 증축했다. 1층은 강당으로 2층은 성당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성당 제대에는 성모 발현 당시 성당에 있던 성모상과 감실이 원래대로 보존되어 있다. 건물 외형은 크게 달라졌지만 성모상과 감실은 중요한 유물이기에 보존되어 왔다. 짜끼우 성당은 베트남 교회가 공식 인정한 성모 발현 성지로 매년 10만여명의 순례객들이 방문한다. 이들을 위해 마련된 순례자의 집이 성당 마당에 마련되어 있다. 베트남 방인 수녀회인 '십자가 사랑의 수도회' 수녀님들이 순례자 숙소를 관리하고 있다. 성당 오른편에 성모 마리아가 발현할 당시 성당 모형과 함리와 군사의 공격지도 그리고 당시 건물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
짜끼우 성모발현지에 도착하여 계단을 올라가니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미사봉헌하고 사진찍고 있는 순례팀이 있었다.
암튼 시끌벅적한 가운데 재빠르게 마사준비하고 10시 미사시작.
베트남 현지에서 드리는 첫번째 미사이다.
성지순례의 묘미는 본당식구들과 본당신부님 집전미사를 순례성지 성당에서 우리 자체적으로 봉헌할 수 있다는 것.
비록 덥고 습한 날씨에 야외이긴 하지만 의미깊은 곳에서 드리는 미사는 참 소중한 체험이고 감사한 순간이다.
성모발현지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차를 타고 잠시 이동하니 짜끼우 성당이 나온다.
이 성당에 모여 기도하고 있는 중, 성모님이 발현하시어 위급했던 상황을 피해갈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성당에 모여 기도하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하는데, 실로 보지 않고서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듣는 순간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의 '진짜?'를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는 나를 어찌할 건가?
어쨌든 기도로서 위험을 피해갈 수 있음을 믿고 모두 모여있지 않았었을까 싶은게, 나라면 과연 그런 믿음을 가졌었을까 생각도 해본다.
짜끼우 성당을 둘러보고 호이안으로 이동하였다.
호이안 호이안은 참파왕국(2~17세기)의 도시였다. 말레이계의 참족은 기원전 200년경과 기원후 200년경에 걸쳐 자바에서 이곳으로 건너와 참파왕국을 이루었다. 후에와 나짱 역시 참파왕국의 도시들이었다. 참파왕국 시기인 1세기부터 호이안은 동남아시아 최대의 항구였으며 16세기말부터 17세기초까지는 베트남에서 '바다의 실크로드'라고 부르던 중요한 교역로의 중심항구였다. 당시에 호이안에는 중국 화교, 일본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인도인들까지 드나들며 번성했고 덕분에 동양적이면서도 서구적인 독특한 분위기의 도시가 되었다. 이후 호이안에 토사가 쌓여 큰 배들이 드나들 수 없게 되면서 무역의 중심이 호이안에서 다낭으로 옮겨져 소외되었으나 덕분에 20세기 베트남 전쟁의 포화를 비껴갈 수 있었고 도시가 훼손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호이안의 옛 지명은 '하이포'였고 하이포는 '일본다리'라고 불리는 다리를 가로질러 마을이 나뉘어있었다. 16~17세기 이곳에 1,000여명 이상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으나 에도 시대 쇄국 정책이 시행되면서 일본인들의 수가 줄었다. 호이안 옛 마을은 15~17세기 동남아시아 무역항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점을 인정받아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호이안의 어느 주차장에 버스를 세워두고 옛마을까지는 전동카로 이동한다 하더니 전동카가 없대나~~
암튼 승합차에 나눠타고 이동했다.
12시경 호이안 옛마을에 있는 식당에서 호이안 전통식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역시 맛있다. 분위기에 또 맥주한잔씩.
1시경 호이안 전통마을 구경
호이안 전통마을의 주된 색깔은 진노랑색.
베트남사람들의 노랑색에 대한 애착은 남다른 듯 하다. 황금을 상징한다는데.. 이는 좀 더 알아보고..
노랑색과 초록색과 간간히 보이는 빨강색이 잘 어울린다.
호이안의 진풍경을 보려면 하룻밤을 머물며 야경을 봐야 하는데 그게 좀 아쉽다.
설명을 제대로 못듣고 빠르게 훑어보느라 아쉽게 지나갔는데, 기록을 하며 되집어보니 꽤 예쁜곳을 후딱 지나쳤구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도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야 알았다.
남편은 다시 가면 호이안 옛마을을 가보고 싶다했다.
유람선을 타고 투본강을 거슬러 올라가 도자기마을로 이동했다.
호이안은 투본강을 끼고 있어 옛날 무역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라더니 역시 그럴만하겠다.
도자기마을에서 잠시 물레 체험을 하고, 도자기 마을 골목을 돌아 보았다.
도자기를 보면 언제나 이천도자기와 비교하게 되는게 어쩔수 없는가보다.
가이드가 돼지모양 도자기를 하나식 나눠줬다. 구멍에 대고 불면 소리가 난다.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니 그저 눈에 보이는 것 위주로 보게되어 시야의 차이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질적으로 차이가 있겠다. 난 대체적으로 많이 못본것 같아 아쉽다.
공원의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고 돌아나와 전동카를 타고 버스주차장까지 이동.
오후3시경 다낭의 바나힐을 향해 출발..
바나 힐 바나힐은 해발 1,487m의 바나 산에 만들어진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휴양지이다. 현재는 연간 방문객이 150만명에 이르는 테마파크로 조성되어 있다. 바나 힐에 오르기 위해서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긴 5.8km 구간의 케이블카를 타고 20여분 올라야 한다. 총 3개의 케이블카 구간이 있는데 지상에서 중간지점까지 오르는 바나라인, 중간지점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모린라인, 지상에서 정상까지 한 번에 오르는 인도친라인이 있다. 지상에서 바나라인을 타고 도착하는 중간 지점에는 별도의 푸니쿨라, 디베이 와인저장고, 27m의 석가모니상이 있는 영응사, 9개의 테마파크로 꾸며진 유럽식 정원등이 있다. 정상에는 프랑스 마을, 다양한 놀이 시설이 있는 판타지 테마 파크, 밀랍인형박물관, 전망대 역할을 하는 종탑과 사원 그리고 호텔이 있다. |
호이안에서 약 40분정도 이동하니 바나힐 역이다.
바나힐 역에서 케이블카 약 20분정도 올라가 중간지점 내려 밖으로 나가니 바나 힐의 트레이드마크인 손 모형이 감싸고 있는 다리가 나온다. 이리 높은 곳에 이런 휴양지를 만들 생각을 그 옛날 1919년에 했다는 데에 놀랍지만, 스위스 알프스에서와 같이 이런 생각은 동양에서만 가능한 생각이겠지 싶다.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잠시 이동...썬월드란다.
썬월드에서 약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서울에 롯데월드가 있다면, 다낭에는 썬월드가 있다는 정도의 비교를 해보며 한 커피숍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일몰을 감상하다.
그리고 저녁식사시간..
썬월드 뷔페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7시경 케이블카를 이용해 다시 바나힐 역으로 이동.
호텔로 이동하며 오늘 여정을 마치다.
전날보다는 조금 여유있게 들어와 먼저 씻고난 후 알찬 저녁타임을 위해 1층으로 내려오다.
조금전 다녀온 바나힐 트레이드마크가 그려진 리틀바나힐에 25주년위원회가 모두 모였다.
수제생맥주 한잔하며 지난시간동안 해왔던 일들에 대한 소회를 풀다.
감사함으로 두번째날 일정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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