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산티아고 순례

[까미노 17.]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까미노 절반지점을 통과하다 | 240521

by 바이올렛yd 2024. 12. 19.

떼라디요스 데 로스 뗌쁠라리오스(Terradilllos de los Templarlos)에서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까지  24km 
5시간 30분 소요 (am 6:00 ~ am 11:30)


2024년 5월 21일 화요일

 

8인실에 한국인이 5명, 외국인이 3명, 조용한 가운데 그런대로 잘 잤다. 까리온 알베르게에서 벌레(혹시 베드버그?) 물린 곳 여러 군데가 가렵지만 아직은 참을만하다. 수도원 알베르게라고 벌레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실망스럽다. 새벽 5시 반경 침대에서 내려와 밖을 내다보니 그라시아 님은 벌써 떠날 준비를 하고 나와 있었다. 우리도 준비하고 배낭을 들고 복도로 나와보니 한국인 모녀팀이 쓰던 방이 벌써 비어 있어 한갓 지게 짐정리를 하고 6시경 출발했다. 오늘은 세수도 양치도 안 하고 그냥 길을 나섰다. 이렇게 자연인이 되어가는 건가?

 

알베르게를 출발해 전날 헤맸던 마을길을 통과해 금방 한적한 순례길로 접어들었다. 오늘도 역시 하늘엔 구름이 가득하고, 안개까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다. 거의 보름정도 무릎이 아파 배낭 없이 가뿐하게 길을 걷다가 이제야 제대로 된 순례자처럼 배낭을 짊어지고 길을 걷는다. 

 

출발한 지 40분 만에 다음 마을 모라띠노스에 도착했다. 마을 초입에 바가 있어 무조건 들어갔다. 배낭을 내려놓고 토스트와 커피, 오렌지주스로 아침식사를 했다. 따듯하게 구워진 토스트가 배속을 뿌듯하게 했다.

 

토스트를 먹고 나오는 사이 동쪽하늘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빛나는 아침햇살을 받아보는 게 며칠만인가? 

한국 모녀와 함께 걷던 아가씨와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캐나다유학생 아가씨를 만났다. 모녀는 레온으로 점프한다더니 벌써 이별을 하고 새로운 짝을 만나 함께 걷고 있다.

 

모라띠노스를 빠져나와 약 2.5km를 더 걸어 산 니꼴라스 데 레알 까미노에 도착했다. 발렌시아 지방 마지막 마을이다. 중세시대에 이 마을에는 나병환자를 위한 병원이 있어, 산티아고를 향해 계속 갈 수 없을 정도로 증세가 악화된 병자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전 마을에서 휴식을 취했기에 쉬지 않고 마을을 통과했다. 

진한 향기를 내뿜는 노란 들꽃 사잇길을 걷다 보니, 발렌시아지방과 레온지방의 경계 부분 표지석에 성모님과 함께 소원의 돌들이 쌓여있다. 새벽에 출발하면서 오늘은 부모님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었다. 나의 부모님과 남편의 부모님을 위하여, 그리고 진이의 회복을 기원하며 돌 하나 주워 얹어놓았다.

 

남편은 새벽부터 도통 말이 없다. 이럴 때마다 무슨 문제가 있었나 되새겨보면서 머릿속이 시끄러워지곤 하는 난 시간이 지날수록 은근히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냥 무심하면 될 텐데 그게 잘 안된다.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전날과 달라진 것은 내가 배낭을 메고 걷는다는 것뿐 다른 게 없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어보겠다는데 힘을 불어넣어 줄 생각은 안 하고 왜 신경 쓰이게 저러는 걸까 생각하다 혼자 툴툴거리며 스틱으로 땅을 세게 찍으며 쾅쾅 걷기도 하고, 남편이 보기 싫어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걸었다. 생각해 보면 나 혼자 지레 짐작하고 화내고 있는 거다.   

 

혼자 툴툴거리는 사이 숲길로 들어가 멀찌감치 돌로 된 다리와 함께 옛 건물이 나무사이로 보인다. 13세기 중세시대 다리를 건너 오른편에 푸엔테 성모성당이 서 있었는데, 수년동안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쓰이기도 했던 곳이라 한다.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있노라니 뒤따라오던 외국인 아가씨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반가워한다. 연이가 말하던 순례길 절반지점이 바로 이곳이었던 것이다.

 

뒤따라오고 있던 남편을 바라보며 이곳이 절반지점이라 알려줬다.

 

투덜거림은 일단 뒤로 하고 중요한 순간이니 좋은 마음으로 함께 사진도 찍었다. 

"처음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도 중간지점을 통과할 때도 난 배낭 메고 제대로 걸었네?" 하고 말했더니 남편은 "중간에 그렇지 못했다는 건 당신도 알고 하느님도 알고..."라며 답을 한다. 말을 했다는 건 그래도 좀 풀렸다는 의미다. 나 혼자 업다운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잠시 후 사아군에 도착했다. 담장에 순례자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한국인 순례자도 있다.

 

절반지점인 사아군에서 쎄요를 찍기 위해서는 오전 10시까지 기다려야 한다기에 우린 그냥 통과하기로 했다. 

 

빨간 어닝을 친 바 유리창 너머에 낯익은 얼굴들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다. 트래킹 멤버들이었다.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우린 계속 걸었다. 

 

담장에 'Aun sigo creyendo en los finales felices'라고 쓰여있다. 해석해 보니 '나는 아직도 해피엔딩을 믿는다'라는 의미다. 그래 우린 끝까지 무사히 갈 수 있어.

 

산 베니또 아치가 나왔다. 17세기 산 베니또 데 사아군 수도원에서 만든 건축물이다. 당시 산 베니또 수도원은 동전을 주조했을 만큼 부유했었다고 한다. 

 

사아군을 빠져나올 무렵 뒤에서 갑자기 그라시아 님이 나타났다. 트래킹 멤버와 인사 나눈 그 바에 함께 있었노라며 마침 우리 지나가는 것을 보고 먼저 일어나 쫓아오셨다고 한다. 

 

그라시아 님과 오랜만에 함께 걸으며 그동안 못다 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젠 서로 의지가 될 만큼 동지가 되어버렸다.

 

사아군 지나 베르시아노스로 오는 길은 그늘이 진 끝없이 펼쳐진 직선 길이다. 플라타너스나무 그늘, 포플러나무 그늘, 순례길 조성하느라 아주 오래전에 심어 놓았을 법한 나무들이 길 왼편에 일렬로 서있다.

 

비슷한 풍경이 연이어 나타나는 가로수길을 거의 두시간가량 걸었을 무렵 대리석 벤치가 늘어서 있는 쉼터와 함께 순례자 묘비와 뻬랄레스 성모 소성당이 나왔다. 성당 내부에 '라 뻬랄라' 성모상이 있다고 하는데 외관만 보고 지나쳤다. 

 

오전 11시 넘어 베르시아노스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알록달록 색을 칠한 트럭과 함께 세요를 찍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마도 기부금을 내고 세요도 찍고 조개껍질도 받는 모양이었다. 트럭 앞을 지나 우리의 목적지를 찾아 이동했다. 우리에겐 알베르게에 도착하는 게 급선무였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있었지만 침대수가 적어 우선 공립알베르게를 찾아갔더니 우리 앞에 두 분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앞으로는 계속 우리 패턴으로 움직인다면 굳이 알베르게를 걱정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다. 

 

배낭을 두고 마을 한 바퀴 돌아보고 햇볕을 쪼이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배낭줄이 제법 길어졌다. 느지막이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왔고 그 틈에 캐나다아가씨도 함께 있어 반가워 손바닥을 마주쳤다. 트래킹멤버도, 인사 잘하는 아저씨도, 전날 같은 알베르게를 이용한 사람들을 다시 만났다. 

 

오후 1시 30분부터 체크인 시작. 알베르게 시설은 외관과는 다르게 삐그덕 거리는 마룻바닥에 칸이 구분되지 않은 구조로 침대가 꽤 많았다. 구석진 자리 1,2층을 나란히 배정받고 우리 옆 침대 1층에 그라시아 님이 배정받았다.  

 

우선 브레이크타임에 걸리지 않으려 바로 나가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적당한 바를 찾아 들어가 또르띠아와 빵과 맥주 한잔으로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는 바로 들어와 샤워하고 침낭 뒤집어 말리고, 빨래해 널고, 마당에 앉아 일기도 썼다. 기온은 16도로 햇빛은 좋으나 그늘에 있으면 춥다. 춘천 자매님을 이곳에서 또 만났다. 까리온에서 만나고 이틀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햇빛 좋은 자리에 앉아 실과 바늘로 발가락에 잡힌 물집을 터뜨리고 있었다. 발이 아파 고생스러울 것 같으나 표정은 행복하다. 배낭도 발도 이제 적응이 되어가고 있다며 배낭의 무게는 이미 자신의 체중으로 인식되어졌다고 말한다. 난 사실 오늘에서야 제대로 배낭을 메고 걸었기 때문에 절대 그렇지 않다. 양쪽 골반뼈가 살짝 아프기까지 하지만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남편은 오늘 내가 배낭을 메고 걸으며 탈이 날까 봐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그 걱정이 내게는 짜증으로 전해졌던 거다. 웃으면서 걱정해도 될 텐데 말이다. 

 

저녁시간에 레크리에이션 타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독일 남자 두 명이 기타 치며 노래 부르기 시작해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라시아 님을 끌고 들어가 앉아 그들과 함께 했다. 나중에 제주도에서 온 분이 뽀글 머리 청년과 캐나다아가씨를 초대했다. 뽀글 머리 청년이 기타 치고 캐나다 아가씨가 노래를 불렀다. 산타마리아 알베르게에서처럼 오늘도 죤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loads'를 힘차고 신나게 불렀다.

 

저녁식사는 숙소에서 준비해 준 식단으로 빵, 샐러드, 감자수프, 사과가 세팅이 되었다. 알베르게 주인은 벽에 쓰여있는 시를 박자에 맞춰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힘차게 합송 하도록 유도했다. 뭔가 의지가 불타오르는 듯한 것이 앞으로의 순례길에 힘을 불어넣어 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재밌는 구호를 함께 외치고 식사를 시작했다. 푸짐한 식사를 제공받았는데, 다음날 아침식사도 준비된다 하여 기부함에 15유로씩 30유로를 넣었다. 

 

삐그덕 거리는 마룻바닥에 난간 없는 2층침대, 그리고 내 옆 침대 2층에 덩치 큰 외국인 남자가 올라가 잠을 자는데, 이분도 역시 드르렁 대장이었다.

그럼에도 이제는 조각잠을 자는 게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