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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산티아고 순례

[까미노 18.] 렐리에고스에서 영화 'The way'의 흔적을 찾다 | 240522

by 바이올렛yd 2024. 12. 25.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에서 렐리에고스(Reliegos)까지  20.5km 
4시간 40분 소요 (am 7:00 ~ am 11:40)


2024년 5월 22일 수요일
 
지난밤 어떻게 잠이 들었었는지 두세 시경 깨어보니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 잠시 후 사방에서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특히 내 옆자리 남자분은 낮에 길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잠버릇은 대단히 사나웠다. 그는 흰 곱슬머리 단발에 검은 비옷을 입고 반바지 차림으로 홀로 걷는 모습이 영화 속 순례자의 모습처럼 멋있었다. 바로 옆에서 드르렁 코를 골다가 갑자기 숨이 멈추는가 싶다가 다시 내뿜기를 반복적으로 하니 내 호흡도 비정상처럼 느껴져 다시 잠들기 힘들었다. 새벽까지 그 요동 속에 허덕이다가 5시 반경 화장실 다녀오면서 코골이 남자 아래칸 그라시아 님 자리로 내려왔다. 그라시아 님은 우리의 목적지보다 더 걸을 예정이라 하시더니 일찌감치 길을 나서고 없다.
 
잠시 눈을 붙이고 누워있다가 6시 반경 짐을 챙겨 1층 로비로 내려왔다. 식당엔 조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빵과 우유, 커피, 코코아, 시리얼, 잼, 버터, 치즈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빵 세 조각에 딸기잼과 복숭아잼을 발라 따듯한 우유에 코코아를 타서 함께 먹었다. 나름 든든한 아침식사가 되었다. 

 
평소보다 다소 늦은 7시경 밖으로 나가니 밝은 아침이다. 어둠 속에 출발하던 때와는 다른 느낌의 아침이다. 원래 만시야까지 걸을 예정이었지만 숙소문제로 20Km만 걷기로 하고 전날 알베르게를 예약했기에 한결 마음에 여유가 있다.
 
레온에 들어가기 위해선 내일은 좀 더 일찍 출발해야 할 것 같다.
 
남편과 파이팅을 외치고 힘차게 출발하였지만 바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동안 순례 기록을 한 일기장이 생각나 배낭을 풀어 확인해 보니 역시 없다. 알베르게로 되돌아가면서 어깨에 둘레 멘 작은 가방을 뒤져보니 다행히도 그 속에 들어있었다. 보물 같은 순례기록을 잃어버린 줄 알고 잠깐 머릿속에 회오리바람이 불었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언제나 침착하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도로변 순례길에 접어드니 앞서 걷고 있는 트래킹 멤버들이 보인다. 그들을 인솔하고 있는 여자분이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다가 어디까지 이동할 것인지 묻는다. 우린 20km 정도 걷고 멈출 예정이며 알베르게 예약도 했다고 말했더니 그들도 우리와 같은 마을에서 멈출 예정이라 한다.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 들어가 침대가 없으면 다음 마을까지 더 걸을 예정이라 하는데, 레온으로 점프한 사람들이 많은지 순례자들이 다소 줄어든 느낌이라 가능할 것도 같다. 

 
오늘도 하늘은 흐리고 간간히 비치는 햇빛은 길 왼편에서 플라타너스 나무가 적당히 가려준다.
 
배낭을 메고 걷기 두 번째 날, 전날보다는 나름 배낭메는 방법을 터득하여 어깨가 편하다. 아직 무게에는 적응이 되지 않은 상태라 무릎에 다시 문제가 발생하는 건 아닌지 아님 또 다른 문제가 생길지 염려는 되지만, 걱정하는 남편에겐 괜찮다고 했다. 대신 내일은 레온까지 빠른 걸음으로 약 24~5km를 걸어야 하기에 동키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8시 30분경 약 7.5km 떨어진 엘 부르고 라네로에 도착했다. 등은 무겁지만 걷는 속도는 여전히 변함없다. 
마을 입구에 바가 있었으나 아침을 든든히 먹은 관계로 그냥 통과했다.

 
지나온 마을에서도 보았듯이 이 마을 성당 종탑 위에도 새들이 자리를 잡고 살고 있다. 높은 곳에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냥 놔두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분명 건물에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말이다.

 
너무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짐은 당연한 일이겠지. 젊은 부부가 어린아이들과 함께 걷고 있는 모습이 너무 예뻐 한참을 그들의 보폭으로 걸으며 바라봤다. 그들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순간이다. 작은 수레에 짐을 가득 싣고 씩씩하게 수레를 잡고 걷고 있는 어린 아들과 가족들에게 '부엔까미노'를 외쳐줬다.

 
도착하기 한 시간쯤 전 다리 난간에 앉아 쉬고 있는 광주에서 온 가족을 다시 만났다. 그분들과는 테라리요스 알베르게에서 같은 방을 사용했었고, 오르니요스 성당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했었다. 그분들은 전날 우리보다 마을 하나를 더 걸어가 약 30km를 걸었고 오늘은 느지막이 출발했다고 한다. 오늘은 만시야 다음 마을까지 가서 내일 레온 가는 길은 아마도 12km 정도밖에 안 될 거라 한다. 

 
엘 부르고를 지나 약 13km를 걷는 동안 편의시설이 전혀 없고, 중간에 까미노 왼쪽으로 약 1.5km 들어가야 비야 마르코라는 마을이 나온다고 하는데 거기까지 갈 마음은 없다. 길옆 벤치에 앉아 납작 복숭아를 하나씩 꺼내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했다.

 
전날 알베르게에서 함께 노래 부르던 청년들이 우르르 지나간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 재미와 활기를 찾게 되는 것 같다.

 
산티아고를 340km 남겨둔 지점을 지나고 약 한 시간쯤 더 걸어 랠리에고스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바에는 그새 도착해 쉬는 순례자들이 많이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이곳에서 멈추지 않고 더 걷는 사람들일 거다.

 
11시 40분경 예약해 둔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한국인 남자 한분이 벌써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문은 닫혀있고 12시 오픈이라 안내문이 붙어있다. 알베르게 문 앞에 배낭을 내려두고 동네 한 바퀴 돌며 앉을자리를 찾았다. 관공서처럼 보이는 건물 앞 의자에 앉아 쉬고 있노라니 춥다. 기온은 14도라 하지만 햇빛이 없어서 그런지 체감온도는 더 춥다. 우리 알베르게와 아주 가까운 곳에 공립 알베르게가 있었다. 잠시 그곳으로 갈까 생각도 했었지만 예약해 놓고 노쇼 하면 안 되지 싶어 금방 마음을 접었다. 12시가 넘어 알베르게로 가 체크인하고 6인실 룸에 배정받았다.

 
튼튼해 보이는 나무침대에 나름 쾌적하다. 먼저 와서 기다리던 한국인 남자 한분과 전날 기타 치던 사람 옆에서 악보 찾아주던 맨발의 청년과 그의 친구들처럼 보이는 남녀가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얘들아 조용히 잘 수 있지?
 
샤워하고 짐정리 좀 하고 어제 산 바게트 빵과 우유, 사과를 가지고 중정마당으로 나와 앉으니 햇빛이 너무 좋다. 
 
순례 중 성당일은 잠시 잊고 싶은데 본당 청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2019년 자료사진이 필요하다 하는데 순간 짜증스러웠다. 그렇지만 떠나오기 전에 사무실에 자료를 전해놓고 오지 못한 탓이기에 그냥 외면할 수가 없어 연이에게 연락했다. 연이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다음날 친구들과 일본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로, 퇴근 후 분주한 시간이었다. 영상통화를 반갑게 받았다가 용건을 듣더니 거기까지 가서도 성당일에 신경 써야 하냐며 역시나 불쾌해한다. 그렇지만 엄마의 부탁을 들어줘 그 청년에게 외장하드를 전해주며 연락할 일 있으면 엄마에게 하지 말고 자기에게 연락하라고 했단다. 7년 전 연이가 산티아고순례를 떠났을 때 아가다 수녀님께서 딸에게 자주 연락하지 말라 하셨던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도 같다.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춥다. 멀쩡하던 하늘에 구름이 끼고 갑자기 비가 내린다. 중정마당에 널어놓았던 빨래를 걷어놓고, 다음날 먹을 간식을 사러 가기 위해 마트로 가면서 공립알베르게 쪽으로 향했다. 참 신기하게도 다른 길을 놔두고 왠지 그 길로 가고 싶었다. 누군가 그 길로 우리를 이끌었던 것일까? 공립 알베르게 출입문이 열려있어 고개를 돌리니 거기에 그라시아 님과 춘전자매님이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분명 다음마을까지 간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떡 나타나 잠시 내 눈을 의심하며 깜짝 놀라 왜 여기 계시냐 물었다. 그라시아 님은 반색을 하며 벌떡 일어나시더니 우리와 같이 가려고 이 마을에서 멈췄다고 하신다. 

 
공립 알베르게를 지나 마트에 가는 중 'The way' 영화촬영 흔적을 발견했다. 프린트 자료와 함께 낙서처럼 여기저기 쓰여 있지만 남편과 함께 봤던 영화장면이 드문드문 생각이 나며 바로 그 현장에 지금 우리가 와 있구나 실감이 났다.

 
작은 마트에 들어가 사과랑 바나나랑 물 하나 사가지고 돌아온 후, 알베르게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순례자 메뉴로 저녁식사를 했다.  순례자메뉴 코스는 콩 수프 또는 계란 프라이 라이스, 고기와 감자튀김 또는 생선과 야채, 그리고 후식으로 딸기케이크, 그리고 와인 한 병이 함께 놓였다. 미리 만들어졌던 음식을 데워준 것처럼 기대했던 만큼 좋지는 않았다.

 
내일이면 레온에 입성한다. 연이가 레온에서 보냈던 우편엽서를 냉장고에 붙여놓고 자주 보고는 했는데, 하룻밤만 자면 바로 그곳 레온에 우리도 간다. 비 오는 레온에서 오랜만에 길에서 만났다 헤어졌던 사람들을 만나 너무 반가웠다는 말도 떠올랐다. 
같은 방에 묵게 된 한국인 남자와 잠깐 얘기를 나눴다. 그는 레온까지 걷고 돌아갈 예정이라 했다. 왜 끝까지 안 가고 멈추나 의아했었는데, 몇 년 전에 회사에 휴가를 내고 순례길에 나섰다가 일정상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점프를 했었다고 한다. 그때 못 걸었던 구간에 대한 아쉬움이 커 이번에 큰맘 먹고 짬을 내 다시 왔다고 한다. 그제야 이해가 됐다. 은퇴자가 아닌 이상 긴 휴가를 내기가 쉽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싶다. 그분의 열정에 박수를 보냈다. 모두 부엔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