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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산티아고 순례

[까미노 19.] 레온 도착. 대도시에 머무는 날은 몸도 마음도 바쁘다 | 240523

by 바이올렛yd 2025. 1. 1.

렐리에고스(Reliegos)에서 레온(Leon)까지  24km 
5시간 소요 (am 6:00 ~ am 11:00)


2024년 5월 23일 목요일
 
지난밤 잠자리는 안락하고 편안했다. 깔끔하게 잘 정돈되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룸을 이용한 순례자들도 조용했다. 단지 긴 잠을 자지 못하고 중간에 깨어 대단히 아까웠을 뿐. 새벽에 일찍 깨어 한참을 뒤척이다가 5시 30분경 준비하고 밖으로 나왔다. 주방에 들어가 간단하게 아침을 먹었다. 룸과 별도로 중정을 통해 드나들 수 있는 주방을 이용하니 한결 편안하다. 신발을 갈아 신고 단단히 끈을 조여 긴 여정을 떠날 채비를 했다. 내 배낭은 남편과 약속했던 대로 무거운 짐들을 몰아넣어 동키서비스 신청을 해놓고 가뿐하게 문밖으로 나왔다. 남편과 파이팅을 외치며 출발했다. 

 
서쪽 하늘에 보름달이 훤히 떠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오랜만에 반짝이는 별들이 보인다. 요 며칠간 구름 낀 새벽하늘을 맞이하다가 반짝이는 별과 둥근달을 보니 뭔가 새로운 힘이 나는 듯하다. 새벽공기는 전날보다 더 차가운 듯 손이 시리다. 이틀 동안 배낭을 메고 걸었더니 골반뼈도 아프고 어깻죽지도 아프고 배낭무게 때문인지 다리도 아팠는데, 등이 가벼워지니 발걸음이 솜털 날아가 듯 가볍다.  

 
오늘은 유진이 회복을 기원하며 더불어 우리 아들딸을 위해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전날 성당 관련 부탁으로 뾰로통했던 연이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서 공항버스를 이용하여 공항에 잘 도착했다며 여행 잘 다녀오겠다고 연락을 했다. 아무쪼록 좋은 시간 보내고 돌아오라 답을 했다. 

 
동녘하늘이 서서히 밝아오면서 하늘의 별들은 자취를 감추고 달은 서쪽하늘로 넘어갔다. 붉게 타오르는 동쪽하늘에 매료되어 길을 멈추고 사진 찍고 있다가 이쪽저쪽 잔걸음으로 뛰어다니는 그라시아 님을 발견했다. 일출사진을 찍느라 열중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른 새벽에 춘천자매님과 함께 출발해 별과 달과 노느라 이제야 여기까지 왔노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말씀하시는 모습이 귀엽다.
해가 떠오르고,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만시야에 도착했다. 주황빛 성당 건물이 햇살을 받아 붉게 빛나고 조용한 골목에 우리의 발걸음 소리만 들린다.

 
만시야 데 레스 물라스는 레온 왕국과 까스띠야 왕국 사이에 있어 중세 시대까지는 방어 도시의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마을을 빠져나오며 춘천자매님과 그라시아 님을 뒤로하고 우리가 먼저 앞질러 걸었다. 전날 만났던 딸과 함께 온 부부도 다시 만나 반가이 인사했다. 이 길을 걷는 모든 이가 까미노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어 더욱 반가운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간혹 상냥하게 인사받지 않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8시 10분경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있는 작은 바에 들어갔다. 독특한 차림을 한 여자 주인장에게 빵과 오렌지주스를 사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후 그라시아 님이 들어오신다. 함께 걷던 춘천자매님이 발이 아파 뒤로 처져 그녀를 기다릴 겸 쉬었다 가신다고 한다. 그라시아 님은 하얀 까미노 모자를 써보며 어떠냐 물으신다. 검은색보다는 흰색 모자가 어울린다 말씀드렸더니 바로 구입을 하셨다. 순례 초반에 모자를 잃어버려 그새 얼굴이 많이 그을렸다.

 
휴식과 함께 화장실을 이용하고 떠날 채비를 하니 그라시아 님은 뒤따라오는 춘천자매님을 기다렸다가 함께 가겠노라며 먼저 출발하라 하신다. 그라시아 님과 인사하고 바를 나와 얼마 걷지 않아 뽀르마강을 건너는 비야렌떼 다리가 나왔다. 독특하게 휘어진 모양에 아치형 다리모양이 아름답다. 중세시대의 건축기술이 놀랍다.

 
다리를 건너 바로 뿌엔테 데 비야렌떼라는 마을에 진입했다.

 
마을을 지나는 대형버스와 함께 모여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아마도 학교에서 단체로 어딘가 가는 모양인데 부모님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나와 배웅하는 것 같았다. 아이에게 주의사항을 말해주며 잘 다녀오라 손을 흔들고 포옹하는 모습으로 추측해 보며 우리 아이들 어릴 적 생각이 났다.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겠지.

 
마을을 빠져나 올 무렵 길가 벤치에 혼자 앉아 과일을 먹으며 쉬고 있는 춘천자매님을 만났다. 그라시아 님이 바에서 기다리던데 못 보셨냐 했더니 못 보셨다고 한다. 아마도 그라시아 님과 우리가 바에 있는 사이 지나간 모양이었다. 뒤에 오시고 계실 거라 했더니 좀 더 쉬면서 그라시아 님을 기다리신다 한다.  

 
도로를 따라 걷다가 언덕에 올라서니 넓게 펼쳐진 레온이 내려다보인다. 곧 도착할 거란 기대와는 다르게 꽤 긴 시간 도시를 가로질러 걸어야 했다. 레온 대성당의 뾰족탑이 많이 가까워졌을 무렵 어느 남자분이 '부엔까미노'라 말하며 우리에게 막대사탕 하나씩 건네준다. '땡큐~~'

 
현대적인 도시를 지나 중세풍을 느낄 수 있는 골목에 접어들어, 출발한 지 다섯 시간 만인 오전 11시경 우리의 목적지 '베네딕도수도원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체크인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춘천자매님이 쑥 들어온다. 그라시아 님은 끝내 못 만나고 열심히 걸으셨다고 한다. 여자 혼자 온 순례자들은 아마도 보호차원에서 1층에 배정해 주는 듯했다. 우린 2층으로 배정받아 올라가니 대부분이 남자 순례자들이다. 가장 끝방에 구석진 자리에 침대를 배정받았다. 침대커버 씌우고 대충 자리표시해 둔 후 밖으로 나갔다. 

 
우선 레온대성당을 향해 걸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대성당 앞에 사람들이 많지 않아 서로 교대로 사진을 찍고 있노라니 외국인 여자분이 둘이 함께 사진을 찍어주겠노라 하신다. 

 
레온대성당 외관만 구경하고 우선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주변에 있는 마땅한 식당을 검색해 보다가 성당 근처에 있는 빠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빠에야에 얼음 띄운 샹그리아 한잔식 곁들여 점심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뱃속에 쌀이 들어가니 뿌듯하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서 레온대성당 관람을 할까 했더니 오전 관람이 끝나고 오후 4시에 다시 열린다고 한다. 
 
며칠 전 남편이 비 젖은 계단에서 미끄러지고 나서 슬리퍼를 다시 사야겠다고 했던 것이 생각나 잠시 짬을 이용하여 데카트론 레온점에 가보자 했더니 남편이 좋다 한다. 구글지도를 보며 약 20분 이상 걸어서 찾아갔는데 마땅한 게 없어 결국 빈손으로 되돌아왔다. 시간이 아까웠지만 오가며 본 거리와 공원 등을 구경한 걸로 위안을 삼았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느지막이 동키 보냈던 배낭 찾아 정리하고, 샤워하고,  4유로 넣고 세탁기를 돌렸는데 바보짓을 했다. 세탁기를 돌려야 하는데 건조기를 돌려버렸다. 남편은 오히려 냄새 안 난다고 소독된 것 같아 좋다고 하지만 나 스스로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오후 4시경 레온대성당 관람을 위해 밖으로 나가는데 갑자기 호스트가 우리 보고 뭐라 뭐라 스페인어로 다급하게 말한다. 그런데 도대체 감을 못 잡겠다. 결국 영어, 스페인어 가능한 사람들까지 동원하여 우리에게 이야기하는데 내가 '비케어플?' 하니 그렇단다. 소지품 조심하라며 내 가방을 툭툭 친다. 대충 우리 방에 들어온 두 명이 남에 것을 훔치는 걸 봤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인 듯했다. 수도원 알베르게에 들어온 순례자들이 설마 나쁜 짓을 하겠나 싶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호스트에게 고맙다 말하고 바로 레온대성당으로 향했다.
레온대성당에 7유로씩 내고 입장했다. 레온대성당의 웅장함은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다.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파이프 오르간과 성가대석. 특히 이 성당에는 성 이시도르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레온대성당에서 나와 가우디건축물 보러 레온 중심부를 향하여 내려갔다. 레온이라는 도시에서 하루 이틀 정도 연박을 하며 레온의 역사 여행을 해보는 것도 좋다고 하지만 우린 내일 떠나야 하니 시간이 부족하다. 
레온은 1세기경 로마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로 인근의 금광에서 캐낸 금이 모이는 곳이었다고 하며, 현재까지도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의 경제발전 중심지라고 한다. 

 
가우디 작품 보티네스 저택은 보수공사 중인지 철제구조물이 한쪽 벽면을 가리고 있었다. 이 건물은 1892년에 건축되어 현재에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레온 시내 한복판을 거닐며 천천히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갑자기 배가 고파 식당을 찾았지만 시에스타시간이라 마땅히 먹을 만한 곳이 없다. 이곳저곳 검색하며 알아보던 중 남편의 휴대폰이 갑자기 먹통이 되었다. 여행 중 휴대폰은 사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정보를 제공해 주는 터라 온 신경이 휴대폰으로 갔다. 알베르게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휴대폰 살리기에 몰두한 끝에 내 휴대폰으로 아이폰 증상을 찾아보며 재부팅하는 방법을 찾아 결국은 강제 재부팅 성공했다. 갑자기 벌어진 아찔한 상황으로 남편도 나도 정신이 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기운이 다 빠져 식당을 찾기를 포기하고 점심식사했던 그 식당으로 다시 갔더니 다행히도 영업 중이다. 까르보나라 파스타랑 만두처럼 생긴 라비올리 파스타를 시켜서 맥주와 함께 먹었다. 음식은 참 맛있었다. 남편은 메뉴선택을 잘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골목에 있는 작은 바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 청년들을 만났다. 캐나다 아가씨가 바로 보였으나 살짝 눈인사하고 지나쳤다. 
 
저녁 7시에 순례자 미사시간에 맞춰 이동하느라 빠른 걸음으로 이동하다가 성당이 보여 들어갔더니 청소년 미사인지 미사준비하는 어린들이 보인다. 곧 미사를 시작할 것 같지 않아 바로 나와 알베르게로 갔더니 마침 호스트가 밖에 나와있다. 순례자 미사 장소를 물었더니 수도원성당 입구를 알려줘 급히 들어가 앉았다.  

 
같은 알베르게에 묵는 순례자들이 많이 참여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적었다. 그래도 길에서 만났던 익숙한 모습들이 몇몇 보였다. 노신부님이 집전하는 미사는 엄숙하고 수녀님들의 노랫소리는 참 아름다웠다. 미사 후 순례자 축복기도와 함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려주고 일일이 안아주셨다. 노신부님의 축복을 받으며 우왕좌왕했던 오늘 일과가 차분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알베르게에 돌아오니 조심하라는 그 남자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누워있었다. 그동안 보아온 여느 순례자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보다 먼저 들어왔던 남자가 나중에 들어온 두 남자에게 뭐라 뭐라 크게 얘기했고 그들은 알았다 말하는 것 같았었다. 그리고는 우리가 밖으로 나가니 소지품 조심하라는 호스트의 당부가 있었으니 오후시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니 위험의 정도도 어느 정도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알아듣지 못하는 게 다행인지도 모를 일이다.
 
침낭 깊은 곳에 작은 가방을 집어넣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