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에서 수비리(Zubiri)까지 약 23km
7시간 10분 소요 (am 6:50 ~ pm 2:00)
2024년 5월 5일 일요일
시설 좋은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에서의 밤은 하얗게 지새웠다. 우렁찬 코골이 소리에 귀마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6시경 조심스럽게 짐을 챙기고 있는데 6시 30분이 되니 천정에 불이 켜졌다. 본격적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6시 50분경 출발했다. 아침기온이 서늘하고 상쾌하다. 날씨까지도 쾌청하여 잠을 설쳤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가볍다. 피레네 산맥을 넘느라 일부 동키서비스를 이용했던 짐들을 배낭에 나누어 담아 가방의 무게는 훨씬 무거워졌지만 괜찮다.
수도원 알베르게를 떠나 숲길로 들어서니 새소리와 산들바람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푹신한 바닥에 나무들이 울창하게 감싸고 있는 길을 산보하듯 가볍게 걸어 출발지로부터 약 3km지점 부르게떼라는 마을이 들어섰다.
마을 초입 첫번째 만난 바에 들어가 샌드위치와 주스, 커피로 아침식사를 했다. 전쟁터에 나가 이기고 돌아온 영웅들처럼 어제의 힘들었던 순례길을 무사히 넘었을 순례자들의 얼굴에 빛이 나는 듯하다. 나의 마음이 그렇기에 남들도 그리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모두 승리자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게 걷자.
바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중 창밖으로 비아씨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비아씨는 알베르게에 조식을 신청해서 우리보다 좀 늦게 출발한다고 했었다.
우리도 배낭을 메고 스틱을 준비하고 떠날채비를 했다.
마을을 가로질러 다시 들판으로 향하는 길을 걷는 중 낭만적인 나무다리가 나왔다. 생장에서 출발하기 전 55번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한국인 여자분이 우리보다 앞서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개울을 지나며 사진 찍느라 분주한 사이 그분을 앞질러 가며 인사 나눴다. 손수 준비한 듯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양파망에 슬리퍼를 넣어 배낭에 매단 모습이 순례길을 자주 다녀 생긴 노하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웃음이 났다. 어쨌든 나보다 훨씬 언니일 것 같은데 혼자 순례길에 나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존경스럽다.
부르게따 마을을 빠져나와 들판을 걷는 중 왼쪽 무릎이 불편한 신호가 오더니 점차 그 강도가 심해지는 것 같아 신경이 쓰인다. 오르막길이 나오고부터는 자꾸 멈춰 서서 무릎을 주무르게 되는 것이, 어제 무리했는데 오늘 무거운 배낭까지 짊어지고 걷다 보니 고장이 나는 건지 걱정스럽다.
숲길을 빠져나오며 만난 에스삐날 마을은 동화 속에 나오는 그림처럼 아름다웠으나 맘껏 누리기가 어려웠다. 마을안쪽에 있는 성당 아래 벤치에 앉아 배낭 속에 짐도 남편배낭으로 옮기고 무릎에 안티푸라민 로션 마사지도 하였다. 남편은 걱정이 한가득한 얼굴로 괜찮겠냐 묻는데 그래도 가야 한다는 마음밖에는 특별한 대책은 없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목장의 말과 소들은 참 평화로워보인다. 넓은 초원에서 맘껏 풀을 뜯고 맘껏 돌아다닐 수 있으니...
산보가 아닌 순례길었음을 다시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고 걷는다. 뒤따라오는 남편의 눈치가 살짝 보이기는 하나 괘념치 말고 걷자. 앞서가던 타이완에서 왔다는 아가씨가 사진 찍어달라 부탁하며 밝게 웃는다. 젊음은 언제나 빛이 나도록 아름답다. 내가 한 장 찍어주고 나서 그래도 사진에 일가견이 있는 남편에게 다시 찍어달라 부탁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고맙다 인사하고는 힘차게 앞질러 걸어갔다.
왼쪽다리에 신경쓰며 천천히 걷는 사이 자전거 타고 가는 이들, 심지어는 뛰어가는 이들이 우리를 앞질러 간다.
11시경 린소아인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출발지로부터 14.5km 지점이다.
제발 빨리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전날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에 비해 오늘 넘은 산들은 야트막한 고개일 뿐일 텐데 엄살이 절로 부려진다.
남편은 배낭을 가볍게 하고 걸었으면 싶었는데 할수 있다 하여 말리지 않았다 하며 하산길에 방심했음을 일깨워주는데 미안하기도 하지만 짜증도 났다. 그래도 끝까지 가야 하지 않겠나?
비아씨를 드디어 만났다. 한국인 남자와 함께 바위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그분께 제가 아는 신부님 닮으셨다면서 인사를 나눴다. 은퇴 후 오셨다 하니 60대 후반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비아씨는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부엔까미노'라 인사를 잘했다.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엔까미노를 외치는 나와는 정반대로 유쾌하게 인사하는 모습이 예뻤다. 내가 무릎이 고장 났다 말하니 비아씨는 신발이 불편한지 발가락이 좀 아프다 했다. 이제 시작인데 큰일이다 서로 걱정하며 비아씨와 한국인 남자는 먼저 떠나고 우리는 조금 더 쉬고 다시 출발했다.
산을 넘고 숲을 빠져나오니 도로 건너에 푸드트럭이 서있다. 잠시 앉아서 바나나와 오렌지 쥬스를 마시며 몸을 달래는 동안 큰 개 두 마리를 데리고 순례 중인 남자가 숲에서 빠져나왔다. 하마터면 지나가는 자동차에 개가 치일뻔한 아찔한 순간으로 사람들이 일제히 놀란 목소리를 내었다. 지쳐 늘어져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시 힘을 내어 숲길로 들어섰다. 앞으로 남은 거리는 4km이나 산 하나를 또 넘어야 수비리다.
무릎은 점점 더 아파오고 마지막 숲길은 뾰족 바위가 솟아있는 가파른 내리막길이라서 결국은 왼쪽 무릎을 구부지리 못하고 한걸음한걸음 어렵게 내려가고 나로 인해 남편도 지치고 힘들다. 우리를 지나쳐가는 사람들은 연신 부엔까미노라 인사하고 지나가고 이제 30분만 더 가면 도착한다며 격려해 주고 내려가는 외국인 남자도 있었다. 정상적으로 걷는 이들이 많이 부러웠다. 배낭을 잘못 멘 건지 남편 배낭으로 짐을 많이 옮겼는데도 불구하고 어깨도 아파온다. 마음은 괜찮은데 무릎에 어깨까지 몸이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남편은 내 배낭 어깨끈을 조절해 주며 애초에 가방을 잘못 메고 걸었다고 얘기하는데 핀잔하듯이 들려 기분까지 언짢아지려 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숲을 빠져나와 마을이 보인다. 휴~ 살았다.
피레네산맥은 웬만큼 각오를 하고 넘은 길이라 힘들었지만 고통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는데, 처음 아름다운 숲길을 만날 때부터 너무 쉽고 편한 길 일 거라 방심했었나 보다. 전날 무리한 트래킹을 했으니 오늘도 몸을 달래면서 준비하고 걸었어야 하지 않았나 내 몸에게 미안했다. 건강해 보이는 외국남자가 출발하기 전에 스트레칭하고 있는 걸 보고도 무심코 넘긴 안일함에서 결국은 무릎이 고장 나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수비리에는 출발한지 약 7시간이 지난 오후2시경 도착했다.
수비리 마을로 들어가는 아치형 다리를 건너니 질바코 알베르게 앞에 뽀글머리 여인이 담배를 물고 앉아있다. 알베르게 앞에 서서 지도와 대조를 하며 간판을 확인하고 나서 그녀에게 인사했더니 우리를 안으로 안내한다.
주일이라 마트가 3시에 문을 닫으니 참고하라 말해주는 질바코 주인여자의 말에 따라 장바구니 들고 우선 밖으로 나갔다.
몇 안 되는 바 앞에는 테이블마다 사람들이 가득하다. 바에서 점심식사를 하려 해도 자리가 없어서 못하는 상황이다. 마트에서 샐러드와 맥주, 빵, 과일 등을 사가지고 알베르게에 들어와 점심식사를 했다. 질바코 주인여자에게 7년 전에 우리 딸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이야기했더니 우리말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웃는다.
침대정리를 하고 씻고 빨래해서 널고 밖으로 나갔다. 다리 아래에 흐르는 개울물을 바라보며 앉아있노라니 비아씨랑 함께 쉬고 있던 김신부님 닮은 한국남자가 산책을 나왔다. 1시 반쯤 도착하여 공립알베르게에 체크인했다고 하신다. 선착순이었는데 그 시간에도 빈침대가 있었다는 말을 들으며 앞으로 일정에 조금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내일부터는 숙소 예약하지 말고 한번 걸어보자 생각했다.
거리에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길에서 만났던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성당에 들어가 앉았다가 나오는데 비아씨와 55번알베르게에서 출발할 때 인사했던 여자분이 지나간다. 반가워서 비아씨를 불렀다. 그들도 우리를 보고 반가워 인사하고 성당앞 광장에 서서 이야기 하다가 벤치에 앉았다. 내친김에 통성명을 했다. 55번 알베르게 여자분은 대구에서 혼자온 그라시아라 하셨다. 남편과 나이가 같았는데 대구에서부터 이곳까지 혼자 오셨다는 말을 듣고 그 용기가 놀라웠다. 남편은 비아씨와 빌바오 이야기에 빠져서 서로 사진 보여주며 이야기하느라 바쁘고, 난 대구 그라시아 님과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이제 이틀째이지만 오래된 지인들처럼 할 이야기가 많다.
비아씨는 발톱 밑에 고름이 차 올라 내일 당장 걷기 힘들 것 같다며 내일은 버스 타고 팜플로냐로 이동할 예정이라 한다. 남편은 나보고도 무릎이 고장났으니 내일은 버스타고 가서 다리를 쉬어주라 하는데 내일 아침 상황 봐서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했지만 마음에 내키지는 않는다. 제발 괜찮아 지기를 바랄 뿐이다.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처럼 무릎이 아픈지 절룩거리는 사람들이 꽤 있다. 동병상련이라고 나만 그런 게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다.
수비리에 도착한 후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저녁부터 제법 비가 많이 내렸다. 내일 아침에는 날씨도, 내 무릎도 괜찮아지기를 기도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지만 주방에 모여 앉아 저녁 늦게까지 이야기하는 순례자들로 인해 피곤하지만 덩달아 일찍 잘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어를 잘했다면 우리도 그 자리에 합석하여 소통을 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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