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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산티아고 순례

[까미노 4.] 용서의 언덕에 오르자 가파른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 240507

by 바이올렛yd 2024. 8. 17.

팜플로나(Pamplona)에서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까지  25km 
7시간 30분 소요 (am 6:30 ~ pm 2:00)


2024년 5월 7일 화요일
 
지난밤 다리 아파도 2층으로 올라가길 잘했나 보다. 모처럼 꿈도 꾸며 잠을 잤다. 새벽 4시경 잠이 깨어 연이와 연락하고 다음코스 살펴보고 있노라니 알람소리가 울린다. 10분 후에 같은 알람소리가 또 울린다. 아마도 아래층에서 울리는 소리 같은데 한통으로 뚫려있으니 위층까지 다 들린다. 아직 시차적응이 안 되어서 일찍 눈이 떠지는 탓에 굳이 알람이 필요 없는 우리와는 다르게 이쪽 지방사람들은 알람소리 듣고 간신히 일어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서로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다. 
 
5시경 천천히 떠날 준비를 하였다. 여기저기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리고 옆침대 멤버들이 먼저 배낭을 들고 사라졌다.
침대를 정리하고 배낭을 싸 들고 주방으로 올라가니 트래킹 멤버들이 모여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우리도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전날 사놓은 하몽이 들어간 바게트빵과 우유로 아침식사를 했다. 오늘도 내 배낭은 동키서비스를 보내고 6시반경 가볍게 출발했다.

 
어둑한 골목을 빠져나오니 중세시대에서 현재로 점프한 것 처럼 현대적인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가 나왔다. 생각보다 팜플로나가 넓은 도시임을 실감할만했다. 전날 세탁실에서 내게 도움을 준 젊은 한국남자가 아내로 보이는 젊은 여자와 함께 걷고 있어 그들을 믿고 멀찍이 따라가다 보니 그들도 우리도 길을 잘못 가고 있었다. 까미노 표시가 안 보여 서성이고 있는데 횡단보도를 건너 우리 옆을 지나가던 현지 여자분이 길을 가르쳐준다.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와 까미노 화살표를 찾았다. 그들도 우리를 따라 되돌아와 결국은 다시 우리를 지나쳐 앞서 걸었다. 
 
나바라 대학 교정을 가로질러 교외로 나가는 길에서부터 빗방울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걸음이 불편하여 나바라대학 교정 벤치에 앉아 잠시 쉬는 사이 트래킹 멤버들이 뒤따라왔다. 트래킹 멤버와는 일행처럼 엎치락 뒷치락하며 계속 만나게 되어 익숙하다. 띠동갑 언니와는 서로의 무릎을 걱정하며 오늘도 파이팅을 외쳤다. 

 
팜플로나를 출발해 약 5km 지점에 위치한 시스루 메노르 마을을 지나칠 무렵 비가 몰려오는듯했다. 결국 우중순례를 해야함을 아쉬워하며 우비를 입는 사이 전날 만났던 수비리를 점프한 아저씨들이 우리를 지나쳐 가며 '부엔까미노'라 인사한다. 긴말은 안 하지만 마치 동지들 같다. 

 
우비를 입으면 그치는 듯하고 벗으면 또다시 비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고 하늘에 구름이 매우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제발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비가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끝없이 펼쳐진 밀밭에 밀들이 바람을 타고 물결치듯 출렁이고, 구름사이로 간간이 내비치는 햇살에 반짝이는 윤슬같다.   

 
멀리 보이는 산에는 능선을 따라 풍력발전기가 줄지어있고 차가 지나다니는 걸 보니 꼭대기에 도로가 나있는것 같다. 우리가 넘어야 할 뻬르돈 언덕, 우리말로 용서의 언덕이라 한다. 용서의 언덕을 향한 오르막길 초입에 있는 숲길을 지나며 생장 55번 알베르게 같은 방에서 묵었던 모녀를 만났다. 딸과 비슷한 또래의 아가씨와 함께 셋이서 걸으며 젊은 외국인 청년들과도 이야기 나누며 걷는 모습이 부럽고 예쁘다. 함께 걷는 그룹이 점차 형성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뒤돌아보면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한 아름다운 풍경이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순례자들의 소원이 담겨있는 돌탑에 나도 돌하나 집어 얹어놓았다. 

 
출발한지 3시간이 넘은 9시 40분경 11km 지점에 있는 사리끼에기라는 두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성당에 들어가 성호를 그었다. 중간점검을 받는 것처럼 성당에 들어가면 숙연해지면서 '너는 지금 진정한 순례자인가?' 하고 내게 묻는 것 같다. 모두가 쉬어가야 하는 장소인양 그늘에 앉아 간식을 먹고 선블록도 바른다. 남편이 바에 들어가 딸기와 오렌지주스, 카페콘레체를 사가지고 왔다. 우리도 한쪽에 걸터앉아 간식을 먹으며 다리를 쉬었다.

 
에너지를 충전하고 다시 출발했다. 같은 방향으로 걷는이들이 있으니 어느 정도는 그들의 속도에 맞춰 우리도 끝까지 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힘들게 걷는 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도 들지만 그들도 하는데 나도 당연히 할 수 있을거라 용기가 난다.

 
키가 크고 마른 미국인 청년이 오른쪽 다리를 제대로 못쓰는지 긴 작대기로 지탱하며 지나간다. 그 모습을 보며 저 친구도 나처럼 무릎이 아픈가 보다 하다가 어쩌면 원래 장애를 가지고 있는 친구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발랄한 동양인 아가씨가 노란색 반바지를 입고 지나가며 부엔까미노라 웃으며 인사하고 지나간다. 

 
오른편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마을을 출발한 지 40분 만에 가파른 길을 올라 용서의 언덕에 다다랐다. 

 
용서의 언덕이다. 

철로만든 순례자들의 모형은 1996년에 '나바라까미노 친구 협회'에서 제작해 설치했다고 한다.

용서의 언덕에서 언니에게 소식을 전했다. 연이에게 용서의 언덕에 도착했다며 사진을 보냈더니 할머니가 궁금해하시니 이모가 소식 좀 전하라 하셨단다. 집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파리에 잘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한 이후 안부를 전하지 못했다. 친정가족톡에 용서의 언덕 사진을 올리고 잘 걷고 있노라 소식을 전했다. 매일 근황을 올릴까 했지만 남동생네 조카 진이가 많이 아파 마음고생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선뜻 올려지지 않았다.
 
가족과 연락을 하고 배낭에서 납작 복숭아를 꺼내어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연이가 순례길에 가면 납작 복숭아를 꼭 먹어보라 하더니 납작해서 베어 먹기도 편하고 맛도 좋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까지 갈길을 가늠해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완만한 내리막이 아닌 가파른 내리막이라 잔뜩 긴장된다. 가뜩이나 다리도 성치 않은데 자갈이 있는 흙길이라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하며 출발했다. 


왼쪽 다리를 구부릴 수 없어 절뚝거리며 걸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앞서 지나며 여전히 '부엔까미노'를 외쳐준다. 나도 최대한 생긋 웃으며 '부엔까미노'라 말하려 했는데 보는 사람도 웃는 얼굴로 보였을까?
가파른 내리막길인데도 힘차게 뛰어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처럼 힘들게 내려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와 밀밭 사이의 길을 걷다보니 길가에 성모상이 나온다. 성모상앞 벤치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동양인 아가씨가 혼자 앉아 쉬고 있고, 나도 그 옆에 떨어져 앉았다. 배낭에 태극기가 붙어있는 걸 보고 반가워 우리말로 인사를 하며 말을 걸었더니 아가씨도 바라보며 인사한다. 함께 온 친구가 앞마을에서 기다리고 있어 오늘은 혼자 걷게 되었다 하며 먹고 있던 체리를 나눠준다.  

 
용서의 언덕을 내려와 약 한 시간 만에 17.5km 지점 우떼르가 마을에 도착했다. 

 
누군가 흘리고 간 걸까? 아님 버리고 간걸까? 어느 순례자의 신발을 화분 삼아 다육이를 심어놓았다.
 
마을을 빠져 나올 무렵 알베르게와 함께 운영하는 바가 나왔다. 목적지까지 가서 점심식사 하기에는 무리인 것 같아 점심식사를 미리 하고 숙소에 들어가기로 했다. 남편이 빵과 샐러드와 맥주를 받아 들고 왔다.  걸음도 늦은 데다가 좀 여유 있게 출발하여 공립 알베르게에 입실할 수 있을까 걱정은 좀 되었지만 숙소는 운에 맡기기로 했다. 이곳에서 남편은 아까운 맥주를 반쯤 쏟아 매우 안타까워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밀밭과 양귀비꽃, 간간이 포도밭이 눈에 띈다.  

 
이정표에 목적지까지 4.5km 남았다 하니 아직 한 시간 이상 더 가야 할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내리막길이 없을 줄 알고 스틱을 접었는데 또다시 내리막길이다. 스틱을 안 쓰면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오바노스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꽤 가파른 오르막 길이었다. 햇빛이 꽤 따갑게 내리쬐고 그늘은 없다. 이 마을에서 나이 지긋해 보이는 여인이 한국사람이냐 묻는다. 반가워 그렇다 했더니 부엔까미노 하며 인사하신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다녀감을 실감했다.
그나저나 딱 봐도 한국사람처럼 보이나? 일본사람도 중국사람도 한국사람처럼 보이기만 하는 나는 눈썰미가 없는 건가? 

오바노스 마을

오바노스 마을에서 3km 정도만 더 걸으면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이다. 마지막 피치를 올려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면서 비로소 알베르게 걱정이 앞선다. 

 
오후 2시경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했다. 
공립 알베르게는 마을 입구에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알베르게로 들어가니 다행히도 남아있는 침대가 있다. 2층 벙커형 침대 3개가 있는 6인실로 배정받아 들어가니 나이 지긋한 서양여자분 한분만 들어와 계셨다. 아마 마지막 남은 방에 우리가 배정받았나 보다. 안도의 숨을 쉬고 남편이 샤워하러 간 사이 안티푸라민 로션을 꺼내어 무릎에 마사지를 했다. 마침 방에 들어오시던 그 여자분이 코를 가리키며 냄새가 독하다 하신다. 죄송하다 말씀드리고 무릎을 가리키며 아프다 하니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신다. 그분은 이태리에서 혼자 오셨다고 했다.

그라시아 님을 다시 만났다. 이틀 만에 보는 얼굴이다. 마당에 빨래를 널고 돌아서는데 알베르게 뒷문을 통한 계단에 총총거리며 올라가고 계셨다. 반가워 부르니 그라시아 님도 반가워 어쩔 줄 모르신다. 비아 씨는 잘 가고 있는지, 팜플로나에서는 잘 있다 왔는지 다리는 괜찮은지 이것저것 궁금한 게 서로 많아 선채로 이야기하다가 순례자미사에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들어왔다. 
 
중세시대의 거리풍경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듯한 거리를 걸어 마켓에 갔다. 트래킹 멤버 대장님이 그새 장을 보고 돌아오면서 우리에게 마켓 위치를 알려주신다. 저녁거리와 내일 간식으로 파스타샐러드, 또르띠야, 야채, 블루베리, 토마토, 우유, 달걀을 샀다. 알베르게 주방에 아침에 만났던 젊은 한국인 부부가 고기를 굽고 있었고, 트래킹 멤버는 수제비를 끓여 먹고 있었다. 우리도 달걀을 삶고 파스타샐러드, 또르띠야를 야채와 토마토를 곁들여 저녁식사를 했다. 둘러보니 서양인들은 테이블에 앉아 간단한 음식을 먹고 있고, 주방은 우리 한국인들이 다 차지하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마을 끝에 아치형 중세 다리는 왕비의 다리라 한다.

 
낯선 사람들 속에 식탁 한자리를 차지하고 식사를 하는 게 영 어색하고 편치 않지만 이것도 자꾸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라며 다음부터 종종 주방을 이용하자 했더니 남편은 썩 내키지 않은 모양이다. 야채 남은 건 매일 알베르게에서 밥을 해 먹는다는 트래킹모임팀에 기부했다.   

삼위일체 수도원 성당

7시에 순례자 미사가 있다 하여 나갔더니 7시가 아니고 7시 30분 미사였다. 제법 규모가 큰 이 마을의 산티아고성당에서 미사가 봉헌되었다. 신부님께서는 순례자들을 앞으로 나오라 하시더니 기도문과 함께 십자가 목걸이를 하나씩 주시고 세례명도 일일이 물어보시며 축복해 주셨다. 부디 남은 일정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무릎도 빨리 괜찮아지기를 기도했다. 신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따라오라 말씀하시며 사무실에 들어가시더니 크레덴시알에 쎄요도 찍어주셨다. 이렇게 기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데 끝까지 못 갈 이유가 없다.

산티아고 성당

미사를 마치고 알베르게에 돌아와 보니 중앙에 있는 침대 2층에 서양인 청년이 들어와 있었다. 침대에 난간이 없어 난감했는데 그 청년은 양쪽 모두 난간이 없으니 자다가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나도 떨어질까 무서워 최대한 벽에 붙어 쪽잠을 잤다. 이제 다섯 번째 밤을 보내는데 아주 긴 시간이 지난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