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바날 델 까미노(Rabanal del Camino)에서 몰리나세까(Molinaseca)까지 25km
7시간 15분 소요 (am 6:00 ~ pm 1:15)
2024년 5월 27일 월요일
새벽 5시. 가족들에게 간단하게 안부를 전하고 배낭을 챙겨 식당으로 내려갔다. 이른 새벽부터 키 큰 알베르게 봉사자분이 빵과 우유, 커피를 준비해 놓고 계신다. 배낭에 있던 빵과 우유를 간단히 먹고 출발하려 했었지만, 이왕 알베르게에서 준비해 주셨으니 빵 세 쪽에 쨈과 버터를 발라 우유와 함께 먹었다. 역시 수도원알베르게는 마음을 포근하고 따뜻하게 한다. 식사한 자리를 정리하고 로비로 나오니 봉사자분이 먼저 출발하는 여자분과 이야기하고 계신다. 종아리에 나란히 새겨진 조개모양 문신이 멋지다. 로비에 두었던 배낭을 짊어지고 신발을 갈아 신고 봉사자분께 인사하며 함께 기념사진도 찍었다. 출발하는 순례자들에게 일일이 힘을 불어넣어 주심에 감사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6시에 출발. 철의 십자가에 지난 7년 동안 끼고 다녔던 팔찌묵주를 봉헌할 생각에 묵주를 빼어 들고 마지막 기도를 시작했다. 오늘도 진의 회복과 함께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들의 평화를 위해 기도했다. 물론 묵주를 주셨던 정신부님도 포함해서.
어둑한 오르막길을 걷다 보니 점점 밝아지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신비롭다. 한 시간쯤 올라갔을 무렵에는 구름 속을 걷고 있는지 주변에 보이는 작은 꽃들이 뿌옇게 그라데이션 처리를 한 것처럼 황홀하고 몽환적인 분위기다. 사진 찍느라 뒤쳐져 걷던 그라시아 님은 '오 아름다워라 찬란한 세상~~' 성가를 흥얼거리며 마치 천국에 와있는 것 같다며 행복해한다.
어느 순간 갑자기 시야가 맑아지면서 마을이 나타났다. 프랑스길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마을 폰세바돈이다.
중세 레온의 왕 라미로 2세가 10세기에 회의를 개최했던 곳이며, 수도원, 성당도 있었지만 현재에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고, 단지 순례자들이 증가하면서 몇몇 알베르게가 생겼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서있어 사진을 찍고 있노라니 뒤따라오던 그라시아 님이 사진을 찍어줬다.
알베르게 앞을 지나고 폐허가 된 성당의 종탑을 지나 다시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여전히 아름다운 꽃길에 기온은 약간 차다. 아마 폰세바돈에서 묵었다면 분명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지 못하고 어두운 길을 걸어 지나갔을 거다.
마을을 벗어나 20분 정도 올라가니 희미하게 철의 십자가가 나타났다. 폰세바돈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하지만 안갯속이라 높이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일찍 도착한 분들도 이곳에서 일출을 보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마치 철의 십자가를 목표로 까미노 순례를 시작했던 것처럼 숙연해진다. 연이가 산티아고 떠나기 훨씬 전부터 손목에 차고 다녔던 팔찌묵주를 빼서 성호를 긋고 돌 하나를 주워 묵주를 감아 올려놓으니 남편이 준비한 돌을 그 위에 움직이지 않게 눌러놓는다.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며 뭉클해졌다. 지금까지 성실히 살아온 나를 위로했다. 그동안 잘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살자.
11세기경 폰세바돈 마을에 있던 수도원장 가우셀모가 이곳에 십자가를 세운 이후 중세의 순례자들은 십자가에 경배하며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이곳에 봉헌했었다고 한다. 7년 전 연이는 배낭에 매달고 다니던 노란색 세월호 리본을 봉헌했었다.
오랜 시간 걸려 숙제를 한 것처럼 발걸음이 가볍다. 분명 배낭을 메고 산을 넘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이제 그마저도 익숙해진 모양이다. 첫출발부터 무릎이 아파 걱정이 많았는데 어느새 회복되어 잘 걸을 수 있음에도 감사하다. 어느 쪽을 바라봐도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 탄성이 절로 나온다.
철의 십자가를 지나 내려오는 길에 푸드트럭이 보여 따뜻한 커피와 코코아를 마셨다. 그라시아 님이 사주셨다. 차를 마시고 일어서는데 인사 잘하시는 특이한 분이 내려오며 "하이! 조셉, 조세핀!" 하며 다가온다. 전날 알베르게에서 서로 통성명을 했는데 그는 마리노였다. 옆자리에서 차를 마시던 지예 닮은 아가씨와도 인사하고 먼저 출발했다.
철의 십자가로부터 약 2km 정도 내려왔을 즈음 폐허가 된 마을 만하린을 지나갔다. 폐허가 된 건물을 보수하여 순례자용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여러 나라의 국기가 걸려있는 사이로 한 남성이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가지 템플기사단의 상징물인 빨간 십자가도 보였다.
쉽게 걷히지 않을 것만 같던 안개가 걷히면서 파란 하늘과 함께 주변풍경이 선명해졌다. 구름 위로 보이는 건너편 산들과 들꽃과 함께 아직 봄을 맞이하지 못한 듯한 거무스름한 나무들조차 아름답다.
바위에 잠깐 걸터앉아 주변풍경을 감상하며 납작 복숭아를 먹었다. 산속 빠에서 만났던 마리노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지나간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아님 감동이 물결처럼 복받쳐 오른 건지 알 수 없다.
잠시 휴식시간을 갖은 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길은 그 후에도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며칠 동안 계속 보고 걷던 눈 덮인 산은 이제 우리의 왼편으로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산길을 지나 멀리 군데군데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고 바로 아래에 검은 지붕들이 모여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엘 아세보 마을이다. 지붕의 소재가 돌과 석판으로 이루어져 그동안 지나왔던 마을의 집들과는 다른 느낌이다.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빠가 있어 먼저 내려온 사람들이 여럿 앉아 쉬고 있었다. 중간에 납작 복숭아 간식타임의 영향으로 그냥 지나쳤다. 마을 골목은 소박하고 예뻤다.
마을을 빠져나올 무렵 자전거 모양의 조형물이 서 있었는데 이는 자전거를 타고 순례를 하다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독일인 순례자 하인리히 크라우스를 기리는 기념물이라 한다.
정신부님께 '신부님 올라!' 하고 문자로 연락했다. 당신이 주신 팔찌묵주를 철의 십자가 아래 봉헌하고 무사히 잘 내려왔다 말씀드리니 아직도 안 끊어졌냐 하신다. 소중하게 잘 써 줘서 기쁘시다고 하시며 '부엔 까미노!'도 잊지 않으셨다.
까미노 표지석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 이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223.6km 남았다. 리에고 데 암브로스라는 마을을 지나면서 작은 경당에 문이 열려있어 들어가 보니 소원을 담은 촛불이 타고 있다.
하산길을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뒤처진 그라시아 님은 어느새 따라올 기미도 보이지 않고, 한눈팔지 말고 끝까지 잘 걸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언제나 거의 다 왔다고 방심하면 다치기 십상이다.
드디어 목적지 몰리나세카에 도착했다. 길고 아름답고 험한 길이었다.
마을 입구 성당을 지나 중세시대 다리를 건너며 내려다본 개울가에 발을 담그고 쉬는 사람들이 보였다. 산과 물의 조화로 현지인들에게 휴양지로도 인기가 좋다는 몰리나세카는 집들도 꽤나 잘 정돈되어 동네가 깔끔하고 쾌적해 보인다.
마을에 들어서서 첫 번째 빠에 아미라 쓰여있는 검은 티셔츠를 입은 한국 청년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저 한국인임에 반가워 인사하니 그들은 마을 하나를 더 이동해 폰페라다까지 갈 생각이란다. 우린 이 마을에서 멈출 거라 이야기하며 인사 나누고 그라시아 님이 예약했다는 알베르게를 찾아가 보았다. 입구에 들어서니 아무도 없어, 어영부영하다가 시간만 허비하느니 마을에서 좀 떨어져 있지만 원래 가려고 맘먹었던 산타마리나 알베르게로 가기로 했다. 순례자 동상을 지나 마을을 약간 벗어난 한갓진 자리에 알베르게가 있었다.
근래에 가장 늦은 시간인 오후 1시 15분경 알베르게에 체크인했다.
새벽에 우리 앞에 묵주를 들고 걷던 남자가 벌써 들어와 있다.
배정받은 침대 옆에 배낭을 놓아두고 마을로 향했다. 식당을 찾아 헤매다 보니 결국 한국청년들이 식사하던 바 앞까지 갔다. 간단하게 파스타와 함께 맥주를 시켜놓고 앉아 점심식사를 했다. 그라시아 님이 나타났다. 딸이 예약해 준 알베르게에 묵을까 우리가 있는 곳으로 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마을 안에 있는 알베르게에 묵기로 결정했다 하신다.
식사를 마치고 마트에 들러 체리와 함께 간식을 샀다. 마트주인은 덤으로 바나나를 더 넣어주시며 '부엔까미노!' 인사하신다.
알베르게에 돌아온 후 그라시아 님이 연락하셨다. 개울물에 발 담그고 앉아있으니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며 우리 보고 다시 내려오라 한다. 다시 내려가기 귀찮은 생각에 그냥 쉬겠노라 했다.
샤워하고 나오니 남편이 빨래하고 있다. 이제부터 최소한의 빨래는 직접 하겠다고도 말한다. 산을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며 앞으로의 인생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한단다.
저녁식사는 알베르게에 순례자메뉴를 신청했다. 메뉴는 렌틸콩 수프, 샐러드, 스파게티, 요구르트가 나왔다. 같은 알베르게에 묵는 한국인 여성과 우리 둘, 그리고 프랑스 부부, 길을 걸으며 자주 보는 외국인 남성 둘, 그리고 또 다른 미국 남자와 여자 모두 9명이 함께 식사했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한국인 여성은 느린 일정으로 순례 중이라 했다. 우리보다 5일 정도 일찍 출발해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우리말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서빙하던 스페인 남자가 웃는다.
저녁식사 후 야외 벤치에 앉아 일기 썼다.
오늘도 우리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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