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꼭 풀어야 할 숙제처럼 언젠가부터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산티아고 순례.
남편의 퇴직과 함께 시작되었던 제주 한달살이에 잠깐씩 합류했다가 제주 올레길 몇 구간을 함께 걷고, 2023년 우리 본당 25주년 행사와 더불어 수원교구 디딤길 도보순례를 2년에 걸쳐 완주하면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 미션으로 산티아고 순례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었다.
그런데 2024년 새해를 맞이하며 남편은 느닷없이 산티아고 순례를 제안했다. 올해 다녀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며, 더 나이 들어 몸이 쇠해지기 전에 가자한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러나 남편의 말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일정을 정리하다 보니, 조금씩 마음의 준비가 되는 듯했다. 편집 중인 25년사를 3월에 출판하여 부활대축일에 봉헌하고 나면 그래도 한숨을 돌릴 수 있으니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겠나? 그렇지만 무작정 떠나기에는 걸리는 게 너무도 많다.
이것저것 따져보며 일정을 맞춰보니 4월 말부터 6월 중순경이면 나름 큰 무리 없이 다녀올 수 있을 듯도 했다.
비행기표를 끊어야 비로소 순례가 시작되는 거라는 딸내미의 성화에 며칠 동안 비행기표를 검색하기 시작하다 보니 대한항공 직항 노선이 요일마다 금액이 달라 화요일이 비교적 저렴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정해진 일정이 4월 30일(화) 출국, 6월 18일(화) 귀국. 손이 떨려 검색만 하고 구매를 안 하고 있었더니 딸내미가 답답하다며 티켓팅해 버렸다. 그리고는 시작!
비행기 티켓팅을 하고 난 후 약 두 달 동안 물품 준비하고 배낭을 쌌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준비물 배낭(오스프리 36리터), 보조배낭, 여권가방, 신발(호카 아나카파2 미드), 침낭, 우비, 스패츠, 슬리퍼(버캔스탑), 등산스틱, 모자, 트래킹장갑, 버프, 팔토시, 선글라스, 경량패딩, 바람막이1, 트래킹용 긴바지2, 긴팔티1, 반팔티2, 팬티3, 메리야스2, 등산양말3, 발가락양말3, 캠핑용 극세사 수건1, 바늘쌈지, 손톱깍기, 바셀린, 안티프라민, 선크림, 감기약, 소화제, 항히스타민제, 소염진통제, 반창고, 알콜스왑, 마데카솔, 귀마개, 소금사탕, 세면도구, 옷핀, 빨래집게4, 빨래줄, 천 시장가방, 휴대폰충전기 등 총무게- 약 8키로 |
때로는 준비하는 과정에서 남편과 사소한 의견충돌로 떠나기도 전에 힘 빠지는 일도 있었다.
20년 넘게 해 오던 아이들과의 수학공부는 아쉽지만 2월로 마무리해야 했고, 남편 역시 문화원활동을 잠시동안 다른 분께 부탁해야 하는 상황이다. 우리 텃밭농사도 우리 없는 동안 시누이 내외가 틈틈이 봐주기로 하면서 결국 누군가를 귀찮게 하는 꼴이 되었다. 물론 자진해서 돌 봐주겠다 하여 매우 고마웠다.
50일 넘게 자리를 비운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가족 친지 지인들의 응원으로 용기 내어 도전.
드디어 대장정에 나섰다.
4월 30일 아침 5시 반 기상
6시 20분경 집에서 출발..
출발하기 전 기력보충을 위해 홍삼엑기스 한잔씩 하고 아침 먹고 먹을 비타민도 챙겨 나왔다.
잊지 않고 잘 다녀오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 준 로사언니 덕분에 힘이 나지만, 인천대교를 건너오며 잠시 눈물이 찔끔.
지난 3년 동안 치열하게 매어있던 일들을 무사히 완수하고 나서 후련함보다는 섭섭함이 많았던 나 자신이, 속이 콩알만 해서 오는 감정인지 아님 진짜 섭섭했을 만한 일들이었는지 마음이 복잡하다. 나중에 다시 돌아올 때엔 절대 울컥할만한 찌꺼기가 남김없이 해소되었기를...
연이는 휴가까지 내고 우리와 공항까지 동행하여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인천공항 제2터미널 2층에 있는 제주돔베곰탕집에서 우린 미역국을 먹고 연이는 고기국수를 먹었다. 앞으로 장기간 한국음식을 못 먹을 테니 자극적이지 않은 미역국을 선택하였다.
아침식사 후 연이는 차 끌고 집으로 가고, 우린 출국심사... 여행용 세면도구가 100ml 네 개나 들어있다 보니 남편 배낭이 걸렸는데 배낭 오픈 검사 후 통과하였다.
인천공항 제2터미널 파리행 탑승장은 비교적 부산하지 않고 조용했다.
11시 10분 비행기
10시 30분 탑승시간이었으나 지연되어 10시 45분경 탑승시작.
공항에서 혼자 차 끌고 집으로 돌아간 연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벌써 용인 지나고 있는 중이랜다. 엄마가 전화 안 해서 직접 했다면서 조심해서 잘 가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란다. 그리고는 11시 20분, 집에 잘 도착했다고 연락했다. 대견하다 우리 딸.
비행이 지연되어 잘 도착했다는 소식까지 듣고 떠나 다행이다.
대한항공 기내식... 오랜만에 먹어보네
한국식 쌈밥으로 선택했는데, 기내식을 이렇게 맛있게 먹기는 또 처음인듯하다. 남김없이 다 먹고 레드와인 한잔도 곁들였다.
14시간 비행 무료하지 않게 알차게 보내기.
송강호 주연의 거미집 보고, 눈의 피로를 줄이려 클래식 음악 듣기... 시차적응을 빨리 하기 위한 방편으로 비행 내내 될 수 있으면 깨어있으려 윤여정 주연 '미나리', 도경수 주연 '더문'을 더 보았다.
오후 6시경 샌드위치와 음료가 나왔고, 착륙 2시간 반 전에 또 식사가 나와 중국식 쇠고기요리로 선택, 모닝빵만 남기고 모두 먹었다. 어쨌든 대장정을 앞둔 심정으로 최대한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몸 달래기 중이다.
비행 14시간 만인 현지시각 5시경, 하늘에 구름솜이 가득하다.
파리 드골공항에 도착한 후 배낭을 짊어진 채 긴 줄을 서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난 후, 미리 숙지해 놓았던 대로 RER 타러 이동했다. 표 끊는데 조금 헤매긴 했어도 무난하게 패스. RER 티켓 끊는 데에는 트레블로그 카드를 사용했다. 이번 여행 중 트래블로그 카드 첫 사용이다.
파리도착하면 기차로 이동하면서 소지품 조심하라는 주의사항을 연이에게 여러 번 들었기에 조심하며 15개 역을 이동, 당페르 로슈로 역에서 하차하여 호텔까지 약 13분 걸어갔다.
역시 여긴 유럽스타일이구나~~ 야외테이블에 앉아 저녁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구글지도 보고 찾아가기도 조금씩 자신감이 붙는 듯, 이 정도면 우리 둘만의 첫 자유여행 치고 너무 순조로운 거 아닌가 하며 남편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녁 8시 반경 우리의 여장을 풀 호텔에 도착했다. 생장으로 출발하는 날 새벽에 테제베 열차를 타기 위해 몽파르나스 역에서 가까운 미스트랄호텔을 예약했었다. 인쇄해 간 예약내역을 보여주며 서툰 영어에 눈짓, 손짓으로 소통하여 입실 성공.
먼 길 이동하느라 약 스물한 시간을 길에서 보낸 여행 첫날..
자유여행 첫 번째 미션수행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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